미미즈카-귀무덤-! 조선 양민들이여, 편히 잠드소서

마지막날, 이번 문화 답사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교토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신사와 미미즈카(귀무덤), 그리고 일본 국보 제 1호 목조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안치돼 있는 고류지(廣隆寺)견학이 차례로 이루어졌다.



착잡한 오전이었다.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외치며 한반도를 발판으로 대륙을 정벌하려는 야심에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 우리 민족적 차원에서 보면 원수와도 같은 인물, 그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호코쿠(豊國)신사를 찾았다. 그러나 일본인들 입장에서 보면 그는 일본을 통일시키며 국력을 부강하게 하고 대륙으로까지 힘을 뻗으려 한 영웅이 아닐 수 없다.

히데요시의 신사 아래, 걸어서 채 1분 거리밖에 되지 않는 곳에 초라한 무덤 하나가 솟아 있었다. 미미즈카(耳塚), 이른바 '귀무덤'이라고 불렀다.

히데요시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켜 수많은 양민들이 학살되었음을 반증하는 이 장소를 찾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우리의 역사를 잊고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여행이 무릇 삶과 인생의 귀중한 학습 여정이라고 했을 때 이 곳은 교토의 여느 화려한 유적지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그 의미가 클 수 밖에 없었다.

이 귀무덤에 묻힌 죄없는 조선양민의 숫자는 무려 5만명. 그 가운데 1597년 8월부터 10월까지 단 두 달 반만에 이곳에 보내진 남녀노소의 귀와 코가 3만명의 것이라고 한다.

숙연한 마음으로 귀무덤 앞에 섰다. 전쟁이 죄일 수밖에 없고 당시 힘없는 민족이었기에 단번에 물리치지 못한 것이 이 같은 뼈아픈 흔적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하는 마음에 억장이 무너진다.

침략과 약탈의 역사를 왜곡하고 은폐해 가면서도 지금도 그들의 과거사를 합리화하고 있는 일본의 뻔뻔함과 정작 팔을 걷어 부치고 우리의 진실된 역사를 찾아야 할 한국의 사가들이 아직도 눈치만 살피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미미즈카에 서린 이 한 맺힌 조선의 원혼들은 과연 편히 잠들 수 있을까? 그토록 가슴 아픈 현장에서 우리들은 침통한 눈길을 마주하며 서로 말을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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