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봉산 기슭,
자연과 공동체문화, 인간이 함께 어울려 사는 운암마을 사람들의 터전

영운리 운암마을로 가는 길, 영광읍에서 영운리로 가는 길은 두 갈래의 길이 있다.

먼저 고창방면으로 가다가 금광레미콘을 지나면 갈래길이 보인다. 그곳에서 우측으로 휘돌아 내달음치면 쉽게 묘량면 소재지인 장동마을에 다다른다. 또 하나는 광주로 향하는 길을 따라 불갑저수지에 다다르면 대마방면으로 좌회전, 5분정도 차량으로 진입하면 장동 마을과 만난다. 이 장동 마을에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S자형'으로 늘어진 마을이 바로 영운마을이다.

영운마을은 장동 앞 신작로에서 영운교를 건너 마을로 진입하게 된다. 영당사람이건 운암사람이건 간에 누구나 영운교를 건너 마을 안으로 진입한다. 운암마을은 영당마을과 함께 기다란 띠 모양으로 펼쳐져 있기 때문에 본래 마을 진입로는 두 마을이 공동으로 이용했었다. 그래서 영당 마을 중간쯤에 이르면 운암마을 사람들은 영당 앞을 지나지 않고 논둑길로 열린 '똘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운암주민들은 남의 마을 앞을 지나야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테고 그래서 조금 먼 지름길을 이용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5년전 묘량소재지 우체국 맞은편으로 운암마을을 향해 곧장 진입할 수 있는 농로가 자로 잰듯이 1Km 정도 시멘트 포장돼 왕래가 옛날에 비해 훨씬 수월해졌다고 한다. 이 길이 이젠 운암마을 사람의 샛길이던 똘길을 대신해 요긴한 교통수단이 되어 준 셈이다.

운암마을로 향하는 그 직선 농로를 따라 가는 길. 양옆으로 푸른 벼 이파리들이 서로 바람을 일으키며 무더위를 식히는 듯 한들거렸다. 마을에 도착한 때는 이글거리던 폭염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늦은 오후였다.

운암에 들어서니 멀리 오봉산 아래로 함안이씨 문중 제각인 영모제가 보인다. 운암마을은 함안이씨 집성촌인데 이곳에 정착한 이는 충의공 이원의 15세손이자 양간공 이세응의 6세손인 이영한(1706∼?)으로 알려져 있다. 이영한은 조선숙종 때 무과에 급제해 함평현감과 나주진관 병마절제도의를 지냈던 사람으로 현재 그의 자손들이 운암마을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운암마을은 영당마을과 함께 영운1리에 속해있는 마을로 19가구에 주민을 모두 합해야 50명을 간신히 웃도는 조용하고 자그마한 시골마을이다.

마을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60을 넘긴 노인들이 도란도란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낡은 마을회관이 있었던 운암마을 앞 너른 공터엔 지난 2월 준공한 경로당이 새 단장을 하고 자리했다. 경로당 바로 옆 골목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커다란 팽나무 당산 아래 운암 모정이 앉아있다. 팽나무의 서늘한 그늘아래 들어앉은 이 모정은 요즘같이 찌는 삼복 무더위를 달래기에는 더없이 좋은 쉼터이건만 80년 세파를 견디며 제 수명을 다한 채 퇴락한 모습으로 방치돼 있었다.

그리고 수년전까지만 해도 그 모정 앞으로 운암바위로 불리우는 지석묘 상석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위에 흙을 얹고 풀이 웃자라 이제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구름에 휩쌓인 바위' 이 마을지명이 바로 그 바위에서 유래된 것이었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은 더했다.

제법 발갛게 익어가는 고추 밭가로 웃자란 풀을 매어주는 아주머니, 너른 들판 논둑길을 거닐며 농약을 뿌리는 부부의 모습이 석양에 희미해질 무렵, 그 옛날 운암마을 사람들이 숱하게 걸었을 그 똘길을 따라 어둠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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