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선
법성포초등 안마분교장




학창시절. 제법 낭만적인 글귀를 읊조리는 친구들을 만나면 “비 오는 달밤, 그대와 나 홀로“ 하는 식의 조소(嘲笑)적인 말로 상대를 잠시 어리둥절하게 한 기억이 난다. 부조화의 말장난이다. 글제(題) 신록의 가을은 이런 유(類)가

아니라 요즘 송이도의 자연현상이다.



태풍 ``루사``(2002.8.31)는 인공적인 건축물은 물론 자연에도 큰 피해를 주었다. 팽나무 잎을 모두 갈색으로 태워버렸고, 버드나무는 마지막 잎새도 없이 죄다 쓸어갔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자연이요, 위대한 것이 생명이었다. 일주일도 못되어 버드나무는 아이들 손바닥만한 초록 이파리를 채워 재잘거리기 시작했고, 벚나무는 가지마다 꽃을 피우더니, 마침내 팽나무 숲도 초록빛 싹을 내어 온 섬이 신록의 물결로 재 단장했다. 언덕배기 찔레는 해맑은 초록 잎에 오뚝한 주황색 열매가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상큼하게 아름답고, 메마른 도랑 가 여기저기에서는 구기자가 꽃망울을 터뜨리기에 바빴다. 온갖 나무들이 잎 지고 나서 찾아온 가을을 봄으로 인식한 것이다. 누렇게 할퀸 옥수수 밭은 바스락거리며 유령처럼 헝클 한데. 그렇다. 이런 현상이 식물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힘들고 슬픈 일인가? 태풍 ``루사``의 위력은 대단했다. 가장 피해가 심한 강릉지방은 일일강수량이 870.5mm로 천년빈도(천년에 한번 올 수 있는 강수량)를 넘어섰고, 낙동강 하류의 범람으로 김천 시는 14일 동안 물에 잠기는 등 전국적으로 큰 피해를 입혔다. 이에 정부는 정부수립 후 최대의 재난으로 인정하고 특별법을 제정하여 재해지역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태풍은 악마가 아니다. 태풍은 적도근처의 해수온도가 30℃ 가까이 오르면 그 열을 흡수하여 양 극지방으로 뿌리는 지구의 열 순환시스템이다. 이런 시스템이 없었다면 지구는 이처럼 생명이 살기에 알맞은 환경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태풍은 대개 진행과정에서 열을 빼앗기고 힘이 약해지기 마련인데 ``루사``가 예전 것들 보다 사나워진 것은 당시 우리나라 주변의 해수온도가 높아 오히려 열과 많은 양의 수증기를 공급받아 힘이 더 세어졌기 때문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장마 이후의 집중호우현상이 수년 전부터 반복되고 있고(수년 전 같은 시기에는 ``프라피룬``이 ``루사``에 버금가는 피해를 주었다.) 앞으로는 당연한 자연현상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그것은 지구온난화라는 지구의 오래된 질병 때문이다. 그러므로 ``루사``는 인류를 향한 자연의 준엄한 경고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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