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들여다보기
곽일순 영광방송 제작국장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전통 무속 신앙을 창피하게 여기고, 못 배우고 무지스런 사람들이나 믿는 미신으로 치부해왔다. 세계의 어느 나라도 자기나라 전통 신앙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고 떳떳하게 대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도 자신들의 신토이즘을 창피해하는 일본인은 없다.

오늘 이야기 하려는 서낭당 역시 단어 자체에서 이미 미신의 의미를 떠올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서낭당이 그저 미신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만은 결코 간단치 않은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 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화동음사변증설(華東淫祀辨證說)조에 “우리나라 어디를 가나 고개 넘어가는 곳에는 선왕당(仙王堂)이 있는데, 이것은 성황당을 잘못 말한 것이다.” 라고 기록한 바 있다. 이는 조선 후기에도 전국의 고개 마루마다 서낭당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하겠다. 그리고 사대부들이 그것을 음사(淫祀)인 민간 신앙쯤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서낭당이란 원래 성황(城隍)이라는 고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사당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건립하고 제사를 올리던 주체는 아이러니 하게도 민간이 아닌 국가였던 것이다.



서낭당의 실체

서낭의 전신인 성황은 본시 고대 중국에서 성을 수호한다는 성지(城池)신앙에서 기인한바 남북조시대 이래 성황으로 변하면서 일반화되기 시작하다가 송나라 때 크게 유행 했다. 그리고 우리의 문헌 기록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고려 문종 때인데 「고려사」에 의하면 문종 때 선덕진(宣德鎭)의 새로운 성에 성황사를 짓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즉, 국가에서 공적인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었으며 고려 고종은 몽고병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음은 서낭신의 도움이라며 신호(神號)를 가봉(加封)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사당들을 통일. 통합하여 재배치했다. 그리고 각 군. 현에는 사직단(社稷壇: 풍흉을 주재하는 토지신을 모시는 곳), 여단(질병을 주재하는 여역신을 모시는 곳)을 일괄 설치하여 수령이 제사를 관장토록 하였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이런 방침에 따라 전국 주부군현의 각 고을에 일률적으로 성황단이 설치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국난이나 가뭄이 닥쳤을 때에도 서낭제를 지내 국태민안을 기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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