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은 한국 방문의 해이다. 한편 문화관광부는 올해를 지역문화의 해로 이름지었다. 이는 우리문화의 기초가 됨에도 불구하고 변방의 것으로 인식되던 기층 지역문화의 중요성을 다시금 인식하고 향토문화가 가지고 있는 고유하고 다양한 가치를 우리문화의 전형으로 인정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관광부는 매달 우리역사에 훌륭한 정신유산을 남긴 인물들을 선정하여 각종 지원을 통해 홍보하고 그들의 값진 유산을 오늘에 되살리려 하고 있다.

마침 3월의 인물로 우리 고장의 유학자 수은 강항(睡隱 姜沆) 선생이 선정되어 이 지역 문화 관계자들이 지난 6일 강항 선생의 유적지를 찾아 일본으로 떠나는 한편 이달 말, 기념 학술세미나를 계획하는 등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수은 강항 선생의 본관은 진주이고 1567년 불갑면 금계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뛰어나 신동으로 불리었다. 16세에 향시에 합격하였고 27세에 문과에 급제, 박사, 공·형조 좌랑의 벼슬을 거치며 밀린 조정의 일을 능숙하게 처리하여 선조 임금을 감동시켰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량미와 군기를 모아 의병을 지원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지방민을 모아 적과 싸웠으나 패했고, 바다로 탈출하여 이순신 장군의 진영으로 합류하려다가 도리어 왜적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왜국의 옥에 갇혀서도 나라를 향한 구국 일념으로 기회를 보아 탈출을 몇 번이고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발각되어 좌절되자 그는 포로의 몸으로 일본 승려들에게 유학을 가르치면서 그곳의 병력과 지형 및 전략, 전법을 왜병 몰래 조선조정에 보내니(賊中封疏·賊中聞見錄) 임금께서는 선생의 충절에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그는 거기에서 성리학을 전파하고 일본 성리학의 개조(開祖)가 되었으며<수은집>과 그의 포로생활 체험담을 쓴 <간양록> 외에 <운제록>을 저술함으로써 일본태자의 스승으로 그들에게 천자문과 예의범절을 가르친 영암의 왕인 박사와 같이 일본 학문과 문화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억류생활을 하던 중 풍신수길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 죽음을 애도하는 비문을 남화라고 하는 승려가 써서 세웠는데 강항 선생은 이에 격분해 포로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그 비문에 먹물을 발라 버리고 그 옆에 자기가 쓴 시를 세웠다하니 그의 대담한 용기와 애국심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 한평생 경영한 것이/ 한줌 흙이 되는구나/ 열층 황금전당/ 부질없이 높기만 한데/ 탄알만 같은 내 땅 / 지금 남의 손에 있느니라/ 무슨 일로 조선 땅에 /당돌하게 대들었느냐"



선생의 넓은 학식과 애국심에 감동한 왜인들은 마침내 귀국하도록 선처하기에 이르렀고, 대마도에 들어 당시 납치돼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격문을 발송, 소집하여 함께 돌아왔다.

고국에 돌아온 선생은 벼슬을 굳이 사양하고 죄인을 자처하며 고향에 묻혀 후배를 양성하고 많은 책을 펴내어 대대로 학식을 전했다.



일본을 깨우치고 일본을 경멸할 수 있었던 담대함이 바로 이곳 영광의 기질이고 자랑이며 힘이 되는지 모를 일이다.

선생은 나이 52세(1618년)로 운명했고, 제자와 향민들은 크게 슬퍼했다. 일본에서도 그의 인품과 학문의 깊이에 감복하여 사당을 세워 제를 지내고 , 1992년에는 선생을 추념하는 현창비가 일본 오오주 성지에 세워져 현재의 일본인들도 선생을 추모하고 있으며 이 고장에서도 유림들이 힘을 모아 사우를 짓고 신도비를 세워 내산서원(內山書院: 구 龍溪祠)이라 이름하고 선생을 길이 받들고 있다.

특히 내산서원에는 강감회요 (綱鑑會要)원판인 장판각 668매가 보존되어 있다.

이근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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