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복목사/ 사랑의교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 것이 구원의 완성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기독교가 그저 사람들에게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그런 토속적인 신앙과 별로 차이가 없게 만들어버렸다. 물론 종교가 미래의 영원한 세계가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기독교도 예수를 믿으면 영원한 천국이 그들을 위해 예비 되어 있다. 결코 질병과 고통과 걱정과 근심이 없이 오직 행복과 평강과 기쁨만이 있는 곳이 천국이고, 예수를 믿는 자는 그 아름다운 곳에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남겨두신 이유가 있다. 만약 천국에 가는 것만이 구원의 유일한 목표라면 세상에 있는 시간은 시간낭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남아 있는 동안 우리가 예수님으로 변화되길 원한다. 그것이 예수 믿는 사람도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이다. 성경은 고난이 유익함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매일같이 먹을 것이 풍성한 사람이 감사하겠는가? 아니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다시피 하던 사람이 먹을 것을 얻게 되었을 때 감사하게 될까? 참 아이러니컬하게도 매일 먹을 것이 풍성한 사람이 감사해야 되는 데 사실은 먹을 것이 없던 사람이 먹을 것을 얻었을 때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건강할 때는 건강의 소중함을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건강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줄도 모른다. 마치 건강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가 건강이 나빠지기를 원했으며, 누가 사고로 팔다리를 잃어버리고 싶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건강을 잃은 다음에야 그리고 사고로 팔다리를 잃은 다음에야 그것들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아직도 소중한 것들이 있음에 감사할 수 있게 된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모든 것이 풍성하게 내 맘대로 될 때는 주님을 찾지 않는다. 그러나 내 능력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만나면 주님을 찾게 된다. 그러니 어찌 고난이 유익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문제를 만날 때 문제가 해결되는 데 초점을 맞추고 매달리지만, 하나님은 나 자신이 변화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지고 장난하지 않으신다. 어찌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기뻐하시랴? 그러나 그런 고통의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가 점점 예수님의 인격과 모습으로 변화되도록 하신다. 그리고 필자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고난의 과정이 없이 우리가 알아서 예수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에는 눈가에 눈물이 흐르고, 걱정과 근심으로 밤잠을 못 이루는 날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하나님은 그런 고난의 날 속에서 노래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욥이란 성경인물처럼 “내가 고난을 통하여 정금같이 나오리이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기독교의 구원은 두 가지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첫째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천국가게 하는 것이요, 둘째는 이 땅에서 우리의 모나고 탐욕적이고 교만하고 정욕적인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로 빚어가는 구원이다. 이것을 일명 성화라고 부른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구원받은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로서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될 때에 세상은 믿는 무리로 말미암아 좀더 아름답게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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