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복목사(사랑의교회)




 신앙에 있어서 이원론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많다. 교회에서는 참 좋은 모습, 인자한 모습을 보이지만, 가정에 가면 또는 생업에서는 화도 잘 내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삶이 곧 신앙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약에 와서 예배의 개념이 확 바뀌었다. 예배하면 그냥 교회에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듣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분명 좁은 의미에서는 맞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로마서 12장 1-2절에서는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거룩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말씀한다. 곧 오늘날의 예배는 우리의 몸을 통해 즉 삶을 통해 거룩한 살아있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몸을 통해서 실천함으로써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구약에서도 사실은 예배의 개념은 같았다. 선지서들을 통해서 특히 말라기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성전의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신다. 왜냐하면 삶에서는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고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께 와서는 제사를 드리니 그 모습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나 추악해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예배들이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치 않은 것은 기독교인들이 실제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사랑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고, 은혜 있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서는 우리의 삶이 바뀌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이원론적인 모습은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을 분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것처럼 말하면서도 사람을 위해서는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이 참된 사람 사랑 또한 불가능하다. 요한일서에서는 “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아니 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곧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모든 율법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함으로 다 이룬다.”라고 말한다. 곧 이웃을 사랑함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것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가 매일같이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이 최후에 심판할 때도 “너희 형제 중에 지극히 적은 자 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형제란 말은 매일처럼 만나는 사람들을 말한다. ‘지극히 적은 자’라는 말은 무시할 수 있는 자란 말도 되지만, 드러나지 않는 자를 말하기도 한다. 곧 나의 배우자, 내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다. 너무 일상적이기 때문이고 평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우리 인생의 대다수의 시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일상적인 것에 충성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인생의 대다수 시간을 충성하지 않는 것이다.


 


  영광신문 독자 여러분.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또한 반드시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 사람 사랑은 멀리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매일처럼 만나는 아주 평범한 이웃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거기에 내 배우자, 자녀, 그리고 직장 동료, 이웃집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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