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산바다편지

-다시 조운(曺雲)을 말한다.-

강구현 / 칠산문학회장

 목포항 건너편으로 길게 늘어진 고하도에 서울의 한 사나이가 찾아왔다. 꿈속에서조차 보고 싶었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천신만고 끝에 찾아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토록 사랑하던 그 여인은 벌써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있었다. 너무 늦게 찾아온 것이다. 그 허망함을 달랠 길 없어 천리 타향 낮선 길을 헤매는데 짓궂게도 사랑을 잃어버린 나그네의 쓰린 가슴 속으로 차가운 비만 내리고 그 아픔을 더욱 자극한다. 가수 남진이 부른 노래 ‘울려고 내가 왔나’는 그런 사연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늘마저 날 울려 궂은비만 내리고 무정한사람 내 사랑아 그대 찾아 천리길을 울려고 내가왔나” 서로 사랑하는 청춘 남여 사이에는 안타깝게도 삶이라는 굴레 속에서 허물 수 없는 분단의 한계가 그어져버린 것이다. 전쟁이 주는 이별의 아픔은 이보다 한층 더 가슴을 저리게 한다! .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를 떠나온 북쪽의 사나이는 피난처인 부산의 영도다리 위에서 어쩔 수 없이 두고 올 수 밖에 없었던 고향땅의 금순이를 못 잊어서 희미한 달빛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어디 그 뿐이랴! 우리나라 대중 신파극의 상징이며 여성 수난극의 전형이자 한국형 최루(催淚)극의 원조인 ‘홍도야 우지마라’는 성적(性的) 야수의 소굴에 버려진 채 ‘사랑에 속고 돈에 우는’ 기생 홍도의 그 기구함에서 나라 잃은 백성들은 열광하고 눈물을 흘렸지만 그 내용보다 더 가슴 아린 것이 그 신파극의 원작자인 임선규의 삶이었다.

이름조차 생소한 임선규는 당시 최고의 배우인 문예봉의 남편으로 그의 데뷔작 ‘수풍령’이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이유로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게 되자 그 두 부부는 친일 행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그의 친일 행각이 문제가 되어 설자리를 잃게 되는데 1946년에그는 뜻밖에도 남로당 창당대회에 모습을 나타낸다. 친일에 대한 면죄부를 받기 위함이었을까? 그러나 그의 기구한 운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니 이번엔 좌익 경력이 문제가 되고 만 것이다. 그 덫에 걸린 부부는 결국 월북을 하고 말았는데...


이탈리아, 터어키, 스페인, 중국....전쟁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던 행동주의 작가 어네스트 헤밍웨이. 그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통해 인간만이 발휘할 수 있는 끈끈한 동지애와 사랑을 일깨워주었고, ‘무기여 잘있거라’를 통해서는 전쟁의 허무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영혼은 결국 킬리만자로의 한 마리 표범이 되어 영원한 만년설 속에 잠들어있다.


 


그들(선각자)은 그렇게 갔어도 그들이 남겨준 교훈에 반(反)하는 전쟁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우리들에게 남아서 가슴을 아프게 한다.


 


조운, 지난 6월 26일은 그가 태어난 지 만 109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가 월북을 한지는 올해로 정확히 60년이 되었다. 월북 이후 그의 생사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이미 생존해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작품과 고향 사랑, 그리고 뜨거운 민족애, 그와 관련된 전쟁과 분단의 깊은 생채기만이 아직도 우리들 가슴에 남아있을 뿐이다.


 


그의 시비(詩碑)가 서있는 한전 문화회관 앞 건널목을 지키고 있는 이념의 신호등은 아직까지도 적색인 채로 우리들 의식의 건널목을 가로막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8세기 영국의 사상가 데이빗 흄은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개연성일 뿐”이라고 했다.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일지라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가 실제로 지각하고 있는 것에 근거하여 개연성이 있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일제 치하에서 모든 시인들이 시조는 양반문화 귀족문화라는 인식하에 그 것을 버리고 자유시를 선택했지만 조운은 오히려 시조야말로 가장 민족적인 우리의 전통문학이라 주장하며 자유시를 버리고 시조 창작에 몰두하여 그 형식까지도 현대화 시켰다.


 


해방 후에도 그에게 있어서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의 완성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써 선택이었을 뿐이지 사회주의의 이념 그 자체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화나 정황을 분석해보면 그의 월북 또한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위한 민족주의적 사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하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비 앞에 아직도 붉은 색으로 켜져 있는 이념의 신호등은 오욕칠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성으로 보수를 말하고 진보를 외치는 각자의 욕심과 미움으로 포장 된 허구의 상징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그의 발목에 채워진 이념의 족쇄와 저마다의 경계를 풀어야 한다. 그에게 채워진 이념의 족쇄는 푸는 일은 보수든 진보든 저마다의 욕망 때문에 스스로 자기 자신의 발목에 채워놓은 자신의 족쇄를 푸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욕망에 근거한 이념의 대립만이 존재하는 현 상황에선 통일도 자유도 기대할 수가 없으며 미디어법 하나를 두고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린 대한민국 정치의 발전도 기대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오랜 장마의 지루함보다 더 답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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