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진(金範珍) 법경헌(法鏡軒)

 ..........지역 문화의 특성을 반영하는 지명.........

 우리나라의 주소제도는 경술국치(1910년) 이후 일제가 토지수탈과 조세징수를 목적으로 만든 지적제도에 따라 토지지번 주소체계로 100여 년 동안 사용되어 왔다. 이와 같은 주소제도를 사용하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한 나라로, 지번제도를 고집하던 일본도 30여 년 전에 주소제도를 개편하였고, 심지어 북한도 지번방식이 아닌 도로 명 방식의 주소제도를 사용하고 있다,


 지난 노무현 정부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시행되어 오던 토지지번 주소체계가 무질서하고 복잡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어 이를 개선하기 위해 도로 명 방식의 새 주소체제로 개편하였고, 현 정부 들어 과거제도와 혼란을 막기 위하여 지난해부터 토지지번 주소체계와 새 주소체제를 병행하여 시행하고 있는데, 늦었지만 잘한 일이다.


 그러나 이 제도를 시행하기 위하여 제정한 도로(거리, 길)이름은 여러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다른 지역의 실정은 잘 몰라 단언할 수 없으나 법성면(法聖面) 진내리(鎭內里)의 경우는 역사성도 지역특성도 없는 획일적인 도로(거리, 길)이름으로 온 동네를 비각(碑閣)거리와 서문(西門)거리 문패로 도배질하였다.


 왜 이리되었을까? 그 원인이 혹, 10년 전 발간된 ‘영광군지(1998년)’에 있지 않을까? 하는데 까지 생각이 미쳐 기록의 중요성을 일깨우게 한다.




.......   90년 전에 잘못 표기한 지명 들   .......


 ‘영광군지’에 수록되어 있는 진내리(鎭內里)의 마을 이름은 비각(碑閣)마을, 서문(西門)부락, 현장(現場)부락, 자갈금 부락 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예전에 비각(碑閣)마을이란 호칭은 없었고, 그냥 비각(碑閣)거리라 불렀지 ‘영광군지’에서와 같이 비각마을이라 하지 않았다. 서문부락, 현장부락, 자갈금부락도 마찬가지다. 이들 마을단위의 호칭은 1998년에 ‘영광군지’를 편찬하면서 급조한 지명들이다.


 그럼 진내리에는 ‘영광군지’의 기록대로 이 마을들만 있는 것일까?


한말(韓末)까지 법성면은 50개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었는데,1914년 조선총독부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과거 전라감영직할지였던 법성진(法聖鎭) 진량면(陳良面)이 1890년 조창(漕倉)의 혁파와 1895년 법성진(法聖鎭)의 폐진으로 영광군(靈光郡) 관할지로 바뀌고, 고재열(高在悅)(구례군 마산면 출신, 충추원 의관 역임) 군수 재임기(1915~1920년)인 1918년에 이르러 진량면(陳良面)을 법성면(法聖面)으로, 50개 자연부락을 지금과 같이 11개 리(里)로 통폐합하면서 법성진성(法聖鎭城)안에 있던 상리(上里), 중리(中里), 하리(下里) 등을 묶어 성(城)내의 마을이라 하여 진내리(鎭內里)로 바꾼 곳이다.


 그런데 부락단위 통폐합과정에서 일부 지명의 한문표기가 담당자의 실수였는지, 지방관의 무지였는지, 잘못 조합되어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그로부터 9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를 바로 잡지 못하고 그대로 사용되어 왔다. 즉, 용 룡(龍)자를 써야했을 용덕리(龍德里)가 쓰일 용(用)를 쓴 용덕리(用德里)로 표기되었고, 제방 언()자를 써야했을 대덕리(大德里)의 언목도 마을의 유래와 아무 연관 없는 말씀 언(言)을 써 언목(言木)으로 표기하여 호적등본· 초본 같은 공문서에 잘못 쓰여 왔다. 또, 용 룡(龍)자를 썼어야할 복룡동도 쓸 용(用)자를 써 복룡동(伏龍洞)으로 쓰이고 있고, 집 재(齊)자를 써야할 성재동을 재주 재(才)자를 써 성재동(聖才洞)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뿐이 아니다. 조선 성종 때 편찬된 여지승람의 영광편 제각 조에 수록된 지장산(支藏山)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단되는 덕흥리(德興里)의 지장리도 품을 장(藏)자 대신 농막 장(庄)자를 써 지장리(支庄里)라 하였고, 설 입(立)자를 썼어야 할 입암리(立岩里)가 입암리(笠岩里)로 잘못 표기되고 있다.


 한글, 한문 병기 정책이 3공 이후에 한글정책으로 바뀌었기 망정이지 3공 이전같이 한문을 병기하였거나 한문표기를 일상화 하여 일제강점기에 잘못 표기된 한문표기가 널리 쓰였다면 학술적 폐해는 차치하고라도 이들 마을이 지니고 있는 고유의 의미마저 더 많이 퇴색되었을 것이다.


 어느 지역의 역사적 사실을 고증할 때 문헌이나 구전이 없을 경우에는 그 지역의 이름(지명)에 근원을 두어 이론적 토대를 이룬다. 이를 지명연기설이라고 하는데, 지명을 잘못 표기하면 그릇된 정보를 제공하여 훗날 역사적 고증에 심각한 오류를 범하게 된다.


 마라난타(摩羅難陀)의 법성포(法聖浦)최초도래 설은 문헌이 전무한 상태라 영광군(靈光郡)은 학술용역을 실시하여 이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때 제시된 3가지 근거 중 하나가 지명연기설이고 이를 바탕으로 백제불교최초도래지를 조성하였다. 즉, 법성면(法聖面)의 옛 지명인 아무포(阿無浦)다, 부용포(芙蓉浦)다, 법성포(法聖浦)다 하는 지명이 모두 불가에 연을 두고 있는 지명이고, 특히 불가의 3보(寶)인 법(法), 불(佛), 승(僧)중 2가지인 법(法)과 승(僧) 즉 성(聖)을 내포하고 있는 법성(法聖)이란 지명으로 유추하여 그 성(聖)이 마라난타(摩羅難陀)라고 비정하여 법성포(法聖浦) 최초 도래 설을 뒷받침하였다. 그러나 아무포(阿無浦)다, 부용포(芙蓉浦)다, 법성포(法聖浦)다 하는 지명이 고려 성종 이후 즉 서기 992년부터 사용된 지명인데, 이보다 600여 년 전, 즉 이 들 지명을 사용하기 훨씬 이전인 서기 384년에 백제 땅을 밟은 마라난타(摩羅難陀)를 이와 같은 지명연기 설로 법성포최초도래 설을 주장하는 것은 억지라는 법성포 최초도래설의 부정적 논리에도 인용되어 1600여 년 전의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데 이 지역의 지명이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


 지명이란 이렇듯 그 지역의 문화 요소 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지명을 통하여 그 지역의 역사성과 지역성을 파악할 수 있고. 우리 조상들의 삶 등을 한 눈에 짐작해 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번에 도로명주소제도를 시행하면서 진내리에 부여한 길 이름은 진내리가 안고 있는 혼(지역성)과 뿌리(역사성)를 도려내고, 10여년전에 ‘영광군지’가 ‘비각마을’ ‘서문부락‘ 등으로 마을이름을 급조했듯이 똑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고 있다.


 80년댄가, 90년댄가, 용성리(龍城里) 배우개 마을의 이름이, 발음의 뉘앙스  때문이었는지, 백옥(白玉)마을로 바뀌었는데, 배우개 마을의 끝 글자인 개()자는 법성면(法聖面)의 통일신라시대 지명인 진개부곡(陣介部曲), 즉 진개(陣介)와 연원이 같은 지명이다. 따라서 사학자들은 통일신라시대와 백제시대 법성면(法聖面)의 치소(治所)가, 즉 요즘 같은 군청이나 면사무소가, 이곳 배우개를 포함한 용성리(龍城里)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이는 이곳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옛 성터, 그리고 이 마을의 지명에 진개(陣介)와 같은 갑옷 개()자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같이 백옥(白玉)마을로만 표기하여 세월이 지나면 옛날 옛적 법성면의 치소였던 배우개라는 마음이름의 역사성은 사라지게 되고, 훗날 왜곡된 향토사가 자리하게 된다.




........... 어느 군수, 어느 면장 소리 듣지 않으려면  .......


요즈음 각 가정에는 새로 제정된 길 이름에 번지를 부여한 도로번지표가 산뜻이 색인되어 부착되어 있다. 그런데 거리이름을 바꾸면서 그 마을이 지닌 역사성과 정서, 그리고 오랫동안의 관습을 도외시한 채, 일제강점기였던 90여 년 전의 잘못과 10여 년 전에 발간된 ‘영광군지’의 잘못, 그리고 배우개 같이 훗날 오도되기 쉬운 거리이름을 부착하여 군이나 면에서 “앞으로 이 번지를 쓰시오!.”라고 홍보하고 있다.


 특히 법성면(法聖面) 진내리(鎭內里)의 도로지번은 행정편의주의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혼(지역성)도 뿌리(역사성)도 없는 천박(?)한 길 이름에 번지를 붙여 이대로 고착돼서는 훗날 “어느 군수, 또는 어느 면장 시절에 이 마을이 이런 엉터리(?) 지명으로 바뀌었다.”는 사초(史草)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특히 현재 시행되고 있는 진내리(鎭內里)의 거리이름을 온통 비각(碑閣)거리와 서문(西門)거리 일색으로 표기함은 아주 잘못된 처사다.


 조선시대의 신분제도는 아주 엄격했었다. 법성포(法聖浦)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법성포내(法聖浦內) 주민들도 양민(良民) 사는 곳, 따로 상민(常民)사는 곳 따로, 각각 달랐다. 법성진성(法聖鎭城) 내에는 양민(良民)들이 살았고, 갯마을이었던 현재의 법성면사무소 뒤편으로는 갓쟁이, 대장쟁이, 금은세공, 목수 등 장인들과, 무속인 등과 같은 특수 직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집단을 취락을 이루고 모여 살았다.


 일제강점기에 ‘심청가’의 ‘추월만정(秋月滿庭)’과 ‘춘향가’의 ‘사랑가’로 유명했던, 부산출신, 이화중선(李花仲仙)의 전속 고수(鼓手)였던 김학준(金學俊)도 이 마을 출신이며, 지금까지 이곳에 솟대거리, 연등거리, 하촌거리 등의 지명이 남아 있는 연유도 이와 같은 역사적인 배경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성안(法聖鎭城內)의 마을이란 의미의 진내리(鎭內里)는 「조선시대에는 진량면(陳良面) 즉 지금의 법성면(法聖面)과 수군(水軍)진영인 법성진(法聖鎭)의 치소(治所)가 있었던 마을이고, 일제강점기에는 법성면(法聖面)의 중심상업권역이었던 마을」이다. 




.............비각거리와 서문거리로 도배질한 진내리의 길 이름........


그런데 지금의 거리지번은 진내리(鎭內里)의 이와 같은 역사성이 배제된 채, 과거 이 고장의 중심 권역이었던 이 마을을 마치 마을 밖 마을, 즉 동구(洞口) 밖 마을의 뜻을 지닌 비각(碑閣)거리로 도배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관리들의 공적, 공덕, 선정비 등의 비석(碑石)을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동구 밖, 즉 마을 입구에 세워 그 치적을 널리 홍보(?)했었지 지금의 거리지명과 같이 양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 그것도 당시의 신분으로 지도층이나 식자들이 집단거주하고 있던 법성진성(法聖鎭城)내에 비석(碑石)을 세우고 비석(碑石)거리 또는 비각(碑閣)거리라고 부르지 않았다. 대한민국 어디에도 이렇게 무지몽매한 행정을 펴는 곳이 없을 것이다.


 걸레바탕이 매축되어 신시가지가 되고, 또 다른 지역이 개발되어 법성면이 광역화되어 지금 거리지번의 기록으로 훗날 역사를 쓴다면 조선시대 가장 중심 권역이었던 법성진성(法聖鎭城)내 진내리(鎭內里) 일대를 동구 밖, 즉 마을 밖으로 잘못 이해하게 될 것이다.


 30~40년 전에 영광군수가 이런 행정을 폈다간 고을 어르신들로부터 무진 혼났을 일이다.


 그래서 지금 시행되고 있는 거리지번도에서 반듯이 삭제되고 시정되어야할 거리지명이 비각(碑閣)거리다.


 진내리 동쪽에서 시작하여 서쪽에서 끝나는 전 구간에 걸쳐, 거리비중이 50분의 1도 안 되는 ‘비각거리’와 ‘서문거리’를 진내리의 대표 길로 한다면 지역주민들의 비웃음은 물론 지나가는 소도 ‘비각거리’와 ‘서문거리’ 번지표를 보고 웃고 갈 일이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진내리에도 과거 조선시대부터 사용되어 왔던 길 이름(지명)과 일제강점기에 생긴 길 이름(지명)이 혼재한다.


 조선시대에 법성진성 안에 있었던 길 이름(지명)은 주로 4대문의 명칭을 길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상동문으로 가는 길을 동문거리라 하였고, 서문으로 가는 길을 서문거리, 남문을 지나 동헌으로 오르는 길을 루문거리 라 하였다. 그리고 하동문에 이르는 성문 초입에 선정비 등을 세워 비각거리라 하였다. 또한 조창과 연관하여 해창거리가 있었고, 시장과 연관하여 웃저자거리와 아래 저자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법성포구 앞이 매립되자 길과 거리를 혼용하여 마당거리, 노인당 길, 핵고당(학교당)길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이렇듯 지명은 지명으로 끝나지 않고, 길 이름만으로도  진내리의 뿌리를 가늠할 수 있게 되고, 당시의 시대상과 사회상을 엿볼 수 있어 이 지역의 문화요소적 가치를 일깨우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시행되고 있는 도로(길)이름은 “역사성과 지역 성를 살려야 한다.‘는 법 제정취지와 다른 ’비각거리‘와 ’서문거리‘ 일색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진내리(鎭內里)는 과거 조선시대에 영광군수 관활 밖의 전라감영 직할지였던 법성면(法聖面)의 치소(治所)가 있었던 유서 깊은 마을이고 이곳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 고장의 향토사를 논(論)할 수 없는 곳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영광군(靈光郡) 못지않게 오르내리며 한 시대의 밝고 어둠을 오붓이 보듬고 있는 곳이다.


 밀집취락지구이기 때문에 ‘도로명주소 등 표기에 관한 법률’의 정함에 따라 길 이름을 일일이 표기 할 수 없다면 ‘서문거리’로 표기하고 있는 지금의 길 이름은 ‘상리길’로 ‘비각거리’를 ‘중리길’로 바꿔 표기함도 한 방법이다.


‘상리’와 ‘중리’라는 지명이 조선시대 마을 이름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진내 1리와 진내2리 길 이름의 구간과 유래를 첨기(添記)하였다. 심사숙고하여 하루 빨리 길 이름을 바르게 표기해 주기 바란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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