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산바다편지
강구현/ 칠산문학회장

“나이가 들어 다리가 휘청거리는 것은 젊은 날의 추억 때문이다.”


 


 이는 “대지”의 작가 펄벅이 한 말이다. 이미 지나가버린 날들의 회한(悔恨)이 얼마나 가슴 저미도록 애틋한 것이기에 이런 말을 할까?


 


 금년에도 어김없이 “10월의 마지막 밤”은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 가을 바람소리와 함께 벌써 과거가 되어버렸고, 그렇게 지나간 “10월의 마지막 밤”을 특별한 밤으로 간직하고픈 세대들의 가을은 쓸쓸하게 깊어만 가고 있다.


 


 겨울옷을 꺼내기 위해 장롱의 문을 열면 진하게 풍겨오는 나프탈렌 향기 같은 가을 저녁은, 오랫동안 가슴 속에 묵혀두었던 지난날들의 회상을 끄집어내기에 충분하다. 그렇듯 저물어가는 가을밤에 처마 끝에서 꺾어지는 밤바람소리를 붙잡고 지나간 날들을 회상하며 삶을 생각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시간은 내 자신이 순수한 사람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명리(名利)를 떠나고 신분이나 빈부에 얽매임 없이 긴장과 경계에서 놓인 자유로운 성정(性情)의 본연으로 되돌아간 무사(無邪)의 시간이요 진선미(眞善美)의 시간인 것이다. 그 시간들 속에는 회한이나 쓸쓸함과 더불어 가슴 벅찬 꿈이 새롭게 싹트고 있으며 설레는 낭만이 있는가 하면 아름다운 사랑과 두터운 인정이 묻어있고, 안개비 같이 젖어드는 시름과, 밤이 새도록 잠들지 못하는 그리움과, 찡하게 우러나는 눈물도 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마지막 보루(堡壘)는 정(情) 밖에 없다. 물질 만능의 시대인 최첨단 산업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될 수밖에 없는 심각한 환경오염만큼이나 오염되어가고 있는 인간의 감정! 눈물이 말라버린 석심철장(石心鐵腸)으로 인간성이 상실되어져가고 있는 오늘날의 추세에 비추어 볼 때 새삼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바로 그 정이다. 그 정이야말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는 영혼의 체온이며 사랑과 자비를 생산해내는 원천인 것이다. 그렇듯 다시 나를 일깨워주기에 가장 적합한 “10월의 마지막 밤”은 대지의 실핏즐에 봄비가 스며들 듯, 은은한 달그림자에 꽃향기가 번져가듯, 굳어버린 심장에 혈맥이 돌게 하고, 까맣게 잊어버렸던 내 영혼의 본향(本鄕)이요 정(情)의 옛 뜰에 어느덧 옛 모습으로 와있는 나를 발견하게 해준다. 보라! 가을저녁 창변에 노을처럼 어리비치는 지난날들의 수많은 영상들! 그 곱고 아름다운 마음과 마음들의 그리움 같은, 슬픔 같은, 봄 구름 같이 아지랑이 같이 가슴 가슴에 여울지던 기억?! 湧?...


 


 가을이 깊어 질대로 깊어진 “10월의 마지막 밤” 그 늦가을 한밤중에 듣는 바람소리는 그야말로 윤기 없는 메마른 소리이며 서글픈 노랫소리이고, 기나긴 탄식소리이고, 나뭇잎끼리 서걱이게 하는 목이 쉰 소리다.


 


 그래서 그 밤을 해마다 열병 치르듯 치를 수밖에 없는 세대들에겐 한 잔의 술을 찾을 수밖에 없고 그리운 누군가를 만나야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밤인 것이다.


 


 문득 머릿속에 맴도는 이름 하나 있다./코스모스 까만 씨는 매서운 계절풍에 흩날리고/추억을 일깨우는 바람소리 깊어가는 밤./뜨겁다 못해 식어가고 있는 마음속에/떠오르는 얼굴 하나 있다./정(情)이라면 옳을까?/그리워 그리던 파도소리는 지금/누군가의 속삭임이 되어가고 있다./누군가를 사랑하고픈 밤./밤이면 하늘에 놓여지는 무지개 하나/색깔 하나 더 있어...


 


-강구현의 10월의 마지막 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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