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여가 넘나들 수 없는 숲쟁이 <상>

김범진/ 향리학회원


 법성포 단오행사의 본 무대인 숲쟁이 나무들을 어떤 이들은 법성진성(法聖鎭城)의 연장이라고도 하고, 이 나무들의 나이가‘법성진성(法聖鎭城)과 같은 500년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 나무들은 방풍(防風)과 민속신앙의 발원에서 심은 인공림(人工林)이지 성(城)의 연장은 아니며, 수령 또한 전문가들의 이야기로는 ‘10년생에서 300년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1800년대에 보식을 많이 해 100년 이상 된 나무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서 정자나무나 당산나무로 심어 보호된, 수령이 오래된 노거수(老巨樹)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이렇듯 법성포 숲쟁이 같이 집단으로 심은 곳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시대 이곳은 법성진성(法聖鎭城) 상동문(上東門)의 초입이자 관문이었다. 그 당시 민초들의 고깃배는 진성(鎭城) 앞 포구가 병선과 조운선이 입출항하는 관용지(官用地)였기 때문에 출입이 제한되어, 주로 진성 뒤, 후포(後浦)라 불리던 뒷개의 검산진(檢山津)에서 칠산바다를 드나들었으며, 삼면이 바다로 에워싸여 있던 법성진성을 육로(陸路)로 드나들려면 꼭 이곳 숲쟁이를 지나야 했고, 숲쟁이 또한 이곳을 오가는 이들에게 한여름의 더위를 식혀 주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온갖 이야기 다하며 쉴 수 있는 쉼터를 마련해 주었다. 더불어 지형 여건상 넓은 터가 없었던 이 고장의 유일한 광장이 되어 사람들이 모이니 자연스레 난장(亂場)이 들어 서 오늘날 법성포단오제의 기원이 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300 여 년 전에 우리조상들이 심어 놓은 나무들이 이렇게 군락을 이루어 지금과 같이 전라남도 지정문화재가 되고, 문화재청의 명승이 되기까지에는 이 고장 사람들의 보살핌에 더하여 전래되는 풍수사상과 민속신앙도 큰 몫을 하였다.


 


 옛날엔 법성포를‘수중와우(水中臥牛)’의 형국으로 묘사했었다. 그리고 이 고장 사람들은 이곳 숲쟁이를 ‘바다 가운데 누어있는 소의 허리’로 여겼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사람들이‘법성포가 큰 인물이 나올 고을’이라고 법성포의 허리라고 여겼던 이곳 숲쟁이에 커다란 웅덩이를 파, 소가 허리를 쓰지 못하도록 하였다 고 한다. 결국 이 웅덩이는 1970년 초중 엽에야 겨우 메웠는데, 일제사슬에 벗어난 지역주민들이 기를 쓰며 메우려 해도 메워지지 않다가 연탄이 보급된 후부터 마을 주민들이 타고 남은 연탄재를 밤낮으로 갔다 버려 겨우 메워서 오늘 같은 모양이 되었다. 또, 1980년도 중반에는 홍농에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섬에 따라 비만 오면 질퍽거렸던 진골길이 법성·홍농 간 도로로 변하여 이곳이 동서로 갈려서‘법성포 지맥(地脈)이 잘려 흉사(凶事)가 잦고 장사도 예전 같지 않아 사는 형편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민원(民怨)이 끊이지 않아 이 고장 출신이라 이곳에 얽힌 사연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장재필(張再必)군수가 구름다리를 놓아 다리중간에 화단을 만들어 흙을 채우고 실핏줄 같은 혈맥(血脈)으로 끊어진 동서를 이었고, 초상(初喪)이 나 장지(葬地)가 지척이라도 상여는 이곳 숲쟁이 고개를 넘지 못하고 다랑가지로 삥 돌아 운구하여야 했다. 그리고 그 관습이 불문율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렇듯 숲쟁이는 이 고장사람들이 오랜 세월동안 힘을 모아 지켜온 문화재로 더 보살피고 더 가꿔서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유산이다.


 


 얼마 전만 해도 우리는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그저 그렇고 그랬다. 그도 그럴 것이‘문화재’라는 용어가 풍기는 뉘앙스와는 달리 우리나라는‘문화재’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불과 반세기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고미술품, 골동품, 고물(古物), 고기(古器) 등이 문화재의 전부인양 인식되어 오다가 우리가 지니고 있는 문화적 소산으로 그 범위가 확대되었고‘문화재’라는 용어도 6.25가 일어나던 해에 일본이‘문화재보호법’을 재정하면서 서양 용어인 'Cultural Properties'를 번역하면서 ‘Cultural'를 문화(文化)로 ’Properties'를 재(財)로 번역하여 조합한 용어를 우리나라가 직수입하여 1962년부터 사용하고 있는 단어다.


 


 우리나라에서 문화재의 가치를 일찍부터 깨달아 이를 수집했던 대표적인 인물로,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 안평대군을 꼽는다. 소장하고 있던 서화가 무려 240여 점이었는데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걸작들을 망라하였다고 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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