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이라도 더 사서 경내를 넓혀왔던 보존회는 정령 헛짓한 것일까?

김범진/ 향리학회원


<지난 호에 계속> 일본에서 직수입된 문화재라는 용어는 1962년에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면서부터 점차 일반인들에게 그 중요성이 널리 인식되어 생활용어가 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문화국가의 키워드가 되었는데, 일찍부터 그 가치의 중요성을 깨달아 이를 수집했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을 꼽는다.


 


 소장하고 있던 서화가 무려 240여 점이었는데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당시에 대표적인 걸작들을 망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문헌상의 기록이지 전래되는 작품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일제강점기에 우리문화재를 지켜온 대표적인 분으론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선생을 꼽는다. 일본사람들이 왕릉이나 고분을 닥치는 대로 도굴하거나 사찰을 드나들면서 불화나 불상을 훔쳐가는 시기에 사재를 털어가며 우리문화재를 지켰다. 그래서 오늘날 훈민정음을 비롯한 100여점의 국보와 보물을 소장하고 있는 간송미술관을 탄생시킨 분이다. 또 있다. 해외로 밀반출되는 백자를 안타까워하며 평생을 백자만 수집해 국가에 기증한 수정(水晶) 박병래(朴秉來)선생,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세한도를 일본에 건너가 찾아 온, 진도(珍島)의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선생 등도 우리 문화재의 수호대가로 손꼽히는 분들이다. 어디 그 뿐인가? 임진왜란 때, 안의와 손홍수 같은 선현들이 임진 난 통에 이고 져서 인적이 드믄 내장산 용굴암에 피신시킨 조선왕조실록은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찬란한 꽃을 피웠고, 6.25전쟁 때 해인사에 폭탄을 투하하여 그곳에 진치고 있는 공비들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받고도 절을 폭파하지 못하고 산등성이에 있는 공비에게 기총소사만 김영환 대령은 그 죄로 군법회의에 해부되었지만 우리나라 국보 32호인‘팔만대장경’과 국보 52호인‘장경판전’을 전쟁 통에서 구해내고, 훗날 강릉 상공 전투에서 산화했다. 국보 67호인 구레 화엄사의 각항전 또한 마찬가지다. 빨치산들의 은신처인 화엄사를 불태워 버리라는 영령을 받고 차마 불 지를 수 없어 각황전 문짝만 태우고 화엄사를 구한 차일혁 총경도 있다. 덕수궁 일화도 감동적이다. 6.25 때, 북한군사령부가 있는 덕수궁을 폭파하라는 명령을 받은 제임스 해밀턴 딜은‘한 나라의 왕궁을 훼손할 수 없다.’고 이 명령을 거부했다. 그리고 덕수궁을 살려냈다. 그리고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이렇게 문화재를 지키려는 노력은 동서가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지켜온 문화재는 오늘날 엄청난 경제적 효과를 창출하며 선진국의 척도로 자리 메김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숲쟁이에서 는 이런 문명의 흐름을 외면한 채 무슨 요양소를 짓는다고 공사가 한창이다.


 


 그동안 법성포단오보존회에서는 숲쟁이의 땅 한 평이라도 더 사서 공원 경내를 넓히려고 넉넉지 않은 재원으로 민가를 사들이며 조상들이 물려주신 문화유산을 공들여 가꾸고 보살피며 법성포 단오제를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해서 온 정성 다하여 왔는데 한 쪽에선 새잡이로 요양소를 지으니, 그것도 우리선현들이 바람막이하려고 방품림을 심었던 양택도 아닌 바람통에 요양소를 지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숲쟁이 같이 흔치 않은 문화유산을 가꾸고 보살피는 일을 결코 가벼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숲쟁이 공중변소 빼다 닮은 법성포단오보존회 사무실도 잘못 뀐 단추인데, 이 요양소가 ‘누구하면 다 알만한 우리지역의 내로라하는 이’ 이고, ‘우리지역의 문화 창달에 누구보다 앞장서야 할 위치에 있는 이와 관련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아니 그런 이가 아니더라도 숲쟁이에 삽질하는 일은 결코 하지 말아여 한다. 곱씹고 되뇌어 보아도 우리선현들이 그러했듯이 숲쟁이의 수림대는 넓히고 보살펴 우리후손들에게 고이 남겨 주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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