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기 법성면 삼당리 209번지

 삼당리 당산 마을은 법성포의 북동편 4km에 위치하고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년 전에 청 주 한씨, 창원 황씨, 김해 김씨, 창영 성씨 들이 살아왔다.

우리들의 선조님들의 생활이랑 지역과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 사실이다. 오봉산 줄기에서 북으로 약 5km뻗어 내린 삼면이 바다였던 1910년경 이전에 우리지역 선조님들의 생활을 주로 염업에 의존하여 살아왔다.

그러기에 가까운 이웃에 큰 마을 삼미네 주민들이 염소와 염부를 갖고 운영하고 있으니 자연 그대로 품팔이를 사정해서 갈 수밖에 없는 작고 못사는 마을이었다.

1925년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천기라는 사람이 목맥언을 막을 때 그나마 염부품팔이 사정을 하지 않고도 일을 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

요즘 같이 기계 장비도 없고 인력으로만 간척지해야만 해서 수십리 먼 곳 다른 마을에서 까지 수많은 인부들을 동원해왔다. 그리고는 일하는 능력에 따라 노임을 지불했다. 그때야말로 골병드는 평띄기<우깨도리>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에 보리 가래밥 도시락 지게 짊어지고 바쁜 걸음으로 이른 새벽같이 바다 갯벌판 먼 길 따라 일터로 일찍 찾아가 쉬지 않고 부지런히 고된 일을 많이 해야만 남보다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는 욕심 때문에 고된 일을 막걸리 잔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면 긴 하루의 고된 평띄기를 해야 했다. 그래서 건강을 잃게 되고 몸이 점점 날로 쇄약 해저 같다.

힘깨나 쓰는 건강한 청장년들이 말이다. 노약자들은 엄두도 못내는 고된 일이다. 언막이를 준공하고 1930년경 천기농장 간척답에 소작으로 농사짓기를 시작했는데 염해로 인해서 심어 논벼가 모두 고사해 버리고 여기 우뚝 저기 우뚝 살아남은 수확량은 일명 쪼박 타작으로 끝이 난다.

올해나 괜찮을까 하면 역시 그 지경 몇 년을 계속 온 가족이 허리띠 조르고 피나는 노력을 해 봤자 현장 타조로 일본천기 농장에 비싼 소작료를 바치고 나면 벼 집 밖에 안 남는 가을을 헛수고의 적자로 소득 없는 허탈감뿐이다.

너무나 긴 세월의 고난과 실망의 홧김에 너나없이 남자들은 주막에 모여 주거니 받거니 병고에 시달리는 몸으로 화풀이 술에 취해 하루 해를 보내고도 모자라서 밤에는 외딴 집에서 투전 화투놀이 도박으로 날밤을 지세우니 가정살림 파탄은 물론이고 연약한 여자들이 늙은 부모 공양 어린 자식들 기르기에 감당 할 수 없는 벅찬 무리였다.

이런 시대의 흐름 속에 남자는 남자대로 술주정 큰 소리에 이집 저집 가정 폭력, 여자는 여자들대로 불평불만의 왁자지껄 조석 다툼에 남자의 주먹으로 창문 살 부서지고 이것저것 내던지면 방바닥에 깨트려 부서지는 살림살이 그 가운데 올망졸망 새벽 선 잠결에 일어나 발 동동 구르고 큰 소리로 엄마하고 부르며 여기저기 소리 내여 함께 울고 서있는 어린 자식들 죽지 못해 서로가 너무도 힘겹게 살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했다.

태평양전쟁 패전 후 일본인은 전부 자기나라로 되돌아가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목맥언을 막아 작답한 700여 정보가 인근지역 주민들에게 분할 상환 토록 분배되었다.

해방과 더불어 가난탈피의 기회가 왔다 외정시대의 비싼 소작료가 없어지고 공출이 없어지고 염해도 해가 갈수록 적어지니 이웃마을들과 특히 새미뫼 마을은 영광 군내에서도 으뜸가는 부농촌으로 탈바꿈했다. 그런데 우리 당산 마을은 한해 두해 분배받은 논과 밭을 술 도박 빛 대신 싸게 팔아넘기고 물려받은 가정불화의 가난을 탈피 하지 못하고 삼미네 마을 농사일 품팔이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노임은 남자들이 선불 잡아 술집 외상값 먼저 갚고 남은 돈 집에 갖다 주니 어려운 생계유지 하기는 더욱 어렵다.

이른 봄 못자리에서부터 늦은 가을수확 까지 온 가족 어린 노동력 까지 동원해 남의 집 농사일을 마다 자기 일처럼 해주는 참으로 마음 아픈 통고지라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장 먹고살기도 힘겨운데 미래를 약속하는 자녀들의 상급 고등교육이란 생각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새롭게 변화 되는 역사 삶의 현대화 새마을운동과 때를 같이하며, 겨우 초등학교 중학교의 졸업 나이로 마을청소년들은 한사람 두사람 통고지 선불 잡은 한 맺힌 적은 여비로 눈물로 성공을 다짐하고 고향을 등지고 돈벌이 좋다는 낯선 서울로 출향했다 했지만 세상물정 경험 없는 어린 나이에 돈벌이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직장은커녕 반겨주는 사람도 없고 당장 먹고 잘 곳이 없는 서울거리에 맴돌다 오늘밤 잠자리는 주차 해놓은 차 밑으로 비바람 눈서리 피해지는 자리 찾아 엎드려 기어 들어가 웅크려 눕는다.

그런 줄도 모르는 화물차 주인이 출근길 아침새벽 일찍 나와 차 시동을 걸려다가 깜짝 놀라 큰 소리로 나오라며 잡아 당겨 뺨때리고 야단치며 몰아내는데 원수 놈의 돈 때문에 눈물지고 용서 빌고 잠이 올 리 없다.

당장 배가 고프고 또 오늘 일을 생각하며 가로등길거리에 뜬 눈으로 날 샌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큰 한숨에 입술이 탄다. 죽고 싶은 심정이다. 타는 입술을 깨물고 눈을 감고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본다. 고생 끝에 성공이라는 말 몇 번을 마음에 되새기고 바른 마음으로 바르게 배워서 바른길을 가라던 어릴 적 선생님의 지표를 가슴깊이 새기고 덧없는 세월 따라 지금에 장년이 되고 보니 부모님은 이미 내 곁을 떠나시고 부모님 연갑끼리의 노인네들이 외로운 인생 황혼기의 여생을 고향에서 보내신다.

그래도 한 서리고 눈물겹던 옛 추억이 담긴 당산마을 내 고향을 끝내 지키며 외로운 노인들을 도와가며 살아가는 억척 몇 젊은이들의 기계화 임대 영농의 힘으로 우리 마을은 과거와 반대로 다른 마을들에 비해 선진 발전해가고 있다.

우리 마을사람들 서울에서 대전에서 광주에서 기반 다져 잘 살아 가고 있다. 지난날의 모든 불행은 이미 다 지났다. 이제 우리 마을에 희망의 봄이 찾아 왔다.

두 손 불끈 쥐고 지난날의 애환을 잊어버리고 평화로운 선진 부농마을로 우리들의 탈바꿈 시켜 후손들의 장을 열어주자. 서로가 잘살아 보자는 출향한 젊은이들과 마을 젊은이들의 굳은 화합의 결심에 한 맺힌 외로운 노인들의 즐거운 마음에 위안이 되고 앞으로의 우리 마을은 더욱 발전 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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