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근/ 언론인 프리랜서

“주변도 둘러보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하는 설날이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도로가 막히고 고생스러워도 고향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름답다. 억지로 고향을 찾게 해야 손자를 훌륭한 인재로 만들 수 있다”

밥· 잠자리· 옷 걱정만 없이 살면 ‘부자’ 소리를 듣던 1960년대. 설날이 다가오면 새로운 옷과 신발을 언제 사주실까 기다렸다. 내일이 설날인데 말씀이 없으면 그야말로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날이 어두워지고도 한참 지나서야 ‘엄마’와 옷 가게에 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평소에는 구경도 못하던 맛있는 음식을 배가 불러 못먹을 만큼 먹을 수 있다. 무엇보다 세뱃돈으로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즐거움이란….

그렇다. 설은 즐거운 축제다. 나라마다 새해를 맞으면서 축복을 빌고 즐기는 풍습이 있다. 러시아에서는 1월 1일부터 10일간의 연휴를 즐긴다. 콘서트와 불꽃놀이· 가장행열도 펼쳐지고 촛농을 떨어뜨려 점을 보기도 한다. 토정비결을 보는 우리와 다를 바 없다. 일본인은 연하장과 복주머니에 열광한다. 중국인은 설을 ‘춘절’ 이라 한다. 무려 보름간이나 폭죽을 터뜨리며 복을 비는 축제를 즐긴다. 인도는 지방과 종교에 따라 각기 다른 역법을 쓴다. 그 수가 무려 30가지나 된다. 1년에 30번의 설날이 있는 나라다.

음식물 쓰레기가 문제가 되고, 설 쇠려고 옷사러 가지 않아도 입을 옷 고르는 시간이 꽤 걸리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설은 어떤 모습인가. 선물을 주고 받는 아름다운 풍습은 여전히 살아있다. 오히려 옛날보다 늘어났다. 택배 회사들이 선물을 배달하느라 홍역을 치를 정도다. 제 앞만 보고 살다가 주변도 둘러 보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하는 설날이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도로가 막히고 고생스러워도 고향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도 아름답다. 서둘러 왔다가 서둘러 가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나’ 만이 아니라 ‘우리’가 있게 하는 즐겁고 보람 있는 시간이다. 고향 산천과 친구· 친척들을 만날 수 있는 설과 추석은 그래서 우리에게 축제다. 안타까운 것은 부모들이 자식들 집으로 설쇠러 가는 모습이다. 귀성길은 복잡하고 고생스러우니 부모들이 자식집으로 가는 ‘역귀성’은 보기가 썩 좋지는 않다.

부모를 뵙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도리다. 아무리 처자식 위주로 살아가는 것이 ‘대세’라 하드라도 시골 부모에게 내 얼굴 보고 싶으면 와서 보라고 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니다. 물론 부모 입장에서는 내가 가는 것이 자식들이 고생스럽게 오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기꺼이 길을 나설 것이다. 하지만 편한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역귀성은 자칫 뿌리가 없는 자식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설날 고향에 가지 않으면 언제 고향을 갈 것인가. 고향과 멀어지고 결국 고향을 잊게될 것이다. 역귀성은 손자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뿌리가 어디인지 조차 모르는 사람으로 살게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뿌리를 모르고 사는 사람이 과연 진정으로 행복하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부모와 함께한 귀성길의 추억을 간직한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중 누가 더 풍성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아갈까 한번쯤 생각해보자.

경제적 풍요가 정서적 피폐를 가져온다면 등은 따숩고 배는 부를지 몰라도 행복한 삶은 아니다. 고향 가는 길이 고생스럽다고 안가는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음악· 미술 학원을 보내고 오페라 공연을 보게 한다고 훌륭한 인격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고향도 모르고 이웃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이웃과 더불어 잘 살 수 없다. 그저 몸고생이나 않고 살 수 있을 뿐이다.

훌륭한 손자, 행복한 손자를 두고 싶다면 역귀성은 하지 않아야 한다. 억지로라도 고향을 찾게 하는 것이 손자를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고 국가와 사회에 유익한 인재로 만드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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