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기/ 법성면 삼당리

삼당리 삼미네 마을은 법성포 북동편 약 4km에 위치하고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년전에 밀양 박씨들이 전성을 이루고 살고 있을 때 창원황씨 14세손이 박씨 가문에 처가살이로 와서 흐르는 세월에 박 씨들의 가문이 몰락되고 황 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오봉산 줄기에서 북으로 5km뻗어 내린 삼면이 바다였던 삼미네 마을은 1910년경 이전에는 마을 앞 갯벌 염소<소금 굽는 곳>에서 소금을 구어 팔아먹고 살아왔다.

1920년 일본인 아부가 수항과 샛목간의 을진언을 막아 간척사업을 하다가 1925년 일본인 천기가 뒷개 넓은 면적 목맥언을 막게 되어 앞 개 간척지역을 준공하지 못하고 천기에게 팔아 넘겨주었다.

1925년 목맥언을 막아 준공함에 염업을 패지하고 간척사업 현장 품팔이와 적은 밭농사 수익으로 가난과 싸우며 살아왔다.

1930년 작답된 앞 뒷개 인근 700여 정보의 넓은 면적이 생겨 제일적은 영세농이 한방구 <1200평>중농이 열 방구 대농은 열다섯 방구 이상을 경작하는 호수가 60여촌 가구에서 중농이상 30여 가구가 넘어선 황 씨 가문이었다.

그리고도 여기저기 염해로 버려진 경작주 없는 인깡배미<강가의 깊은 논>가 수없이 많았다.

경작할 노동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면적을 늘릴 수 있는 여건이었다.

이렇게 많은 경작지를 돈 없이도 천기 농장과 소작계약을 맺고 많은 면적의 경작권을 얻고 논갈이 소 한 마리씩 대여 받을 수는 있었지만 인력이 모자라서 사방 인근 수십리 밖의 마을에서 어렵사리 인부들을 구해 채운 꽅등모에서 파물 모까지 인력으로만 30여 일간의 고생으로 심어 놓은 벼는 수원부족과 염해로 인해 많은 면적이 고사해 버리고 만다.

이래서 가을 수확은 적자 운영으로 허탈하기만 하고 농장의 집단 감시 현장타조로 조곡은 소작료도 모자라서 빈손으로 남는 것은 헛건불 벼집 뿐이다.

그러나 이듬해도 어쩔 수 없이 그 땅의 경작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쓰며 농사 일을 반복한다.

1935년겸 부터서야 적어지는 염해로 겨우 모포기가 들어서 가을걷이에 수확의 기쁨을 가져보지만 농장주의 집단지에서 감시 하에 현장타조로 소작료 먼저 가져가면 남은 조곡은 없고 벼집만 집으로 운반 해온다. 그래도 초가지붕 이엉과 겨울살이 땔감 벼집이 남어 떨어지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1940년 수왕 인근마을에 염해로 버려진 인깡배미라도 경작해 보려고 외지에서 많은 이민들이 들어오고 염해도 점점 줄어들어 현장 감시 타조장 들녘에서 천기농장에 소작료를 받이고도 적은 양이지만 몇 가마의 식량 정도와 벼집을 운반 해 놓고 선영 봉사와 내년 봄, 여름 웃쌀 양식으로 아껴놓고 보리 고구마 잡곡밥으로 겨울사리 할 요량인데 세계이차 대전에 급급한 일본국은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가정마다 샅샅이 뒤져 쇠붙이 숟가락 식기 곡식이라면 남김없이 모두 다 빼앗아다가 태평양 전쟁에서 이기려고 최후 발악을 했지만 미국비행기 보잉 B29의 희로시마 원폭투하로 패전하고 말았다.

1945년 8월15일 광복을 맞이했다. 압박과 설움속의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 감격의 대한민국 정부수림이후 천기농장 소작으로 경작하던 농지를 경작인 농민들에게 분할상환하고 자기 소유를 만들라는 농지법이 제정되었다.

비싼 소작료가 없어지고 공출이 없어지고 염해도 해가 갈수록 없어지니 해방과 더불어 집집마다 풍요로운 가을 수확에 마냥 기쁘기만 했다. 외정치하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우리 마을 민속 당산제와 어우러지는 농악 줄다리기를 30여년간을 저지당했다가 해방의 기쁨에 다시 부활.

빈부의 차별 없이 가족식구들의 숫자대로 균등하게 제수비를 마련하여 선조님들의 제례법에 의해 정월 초이렛날을 기점으로 마을에서 정결한 제주를 뽑아 이날부터 부부간의 동침을 떠나 깨끗한 집 방에다 금줄을 치고 매일 같이 동네 식수샘물을 품어 내고 청소하여 이른 새벽에 깨끗한 물로 목욕하고 화장실을 가고 오는 신발도 따로 사용하면서 정결한 몸가짐으로 제물 음식 준비를 남성제주가 손수해서 정원대보름 한 밤중에 원당산 새벽에는 농악리듬에 맞추어 남쪽 깔쿠막당산, 동쪽의 수살샘 거리 당산, 북쪽 뒷잔등 당산에 제를 올렸다.

그리고 아침을 먹고 농악대가 집집마다 마당볼비를 하면서 줄들일 집단을 건립 줄바탕으로 모아 드려서 줄들이며 결혼, 득남, 경사 있는 집, 대농하는 집에서 각기 술밥 먹거리를 준비해온다.

이웃마을 화천리, 용덕리, 용성리, 장곡리, 석교리, 단덕리 그리고 더 먼 곳에서 까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함께 어울러져 한바탕 줄다리기 농악에 흥을 풀고 쑤시밥 콩나물 악때기 안주에 막걸리 잔치가 벌여지고 나서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이 줄을 매고 동쪽 수살 당산나무에 감아 준다. 그리고 열이렛날 까지 삼일 간을 온 동네 사람들이 밤이면 모닥불 피워가며 밤 깊도록 농악을 즐긴다.

1950년 6,25 전쟁 발발로 해방의 기쁨도 잠시 엿고 동쪽상쟁의 비극이 일어났다. 내 나이 열다섯살 때였다. 삼팔선 이북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군 이남은 대한민국 이때에 어느 마을이고 서로가 모함과 사소한 감정의 보복으로 대부분 수많은 양민들이 죄 없이 학살당했다.

그러나 삼미네 마을은 예외로 그러하지 않았다. 황씨 집성촌으로 서로가 불평불만 원한 없이 오직 농사일에만 전념한 순진한 선조들의 농부생활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살벌했던 전쟁시기에 아무 탈 없이 넘겨 보냈던 우리 선조님들이 고맙기 그지없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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