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근/ 언론인 프리랜서

“법정스님의 열반과 김길태 사건은 인간의 본성을 생각케한 사건이다. 스님은 하나라도 더 갖겠다고 아귀다툼을 하는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문제는 어떻게 얻고 어떻게 그것을 다시 비우느냐다. 스님께서는 스스로까지 버리고자 하셨지만 우리는 스님을 버리지 못하겠습니다”

인간 본래의 심성에 대해 맹자와 순자는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다. 맹자는 “어린 아이가 물속으로 들어가려 하면 누구나 구해주려 하는 마음을 갖는다. 아무런 이익이 없어도 그런 마음을 갖는 것으로 미루어 인간은 원래 착한 심성을 갖고 태어난다. 살아가면서 악해질 뿐이다” 며 성선설을 주장한다.

이에대해 순자는 “어른을 보아서는 원래의 심성을 알 수 없다. 어린 아이를 보라. 배고프고 졸리는 등 원하는 것을 부모에게 달라고 떼를 쓴다. 인간의 이기적 면모를 보여준다. 어린이들이 인간에게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 개미를 죽이면서 노는 것을 보라. 인간은 원래 악한 심성을 갖고 태어난다”고 성악설을 주장했다.

빼어난 학자이며 사상가인 이분들의 주장에 대해 감히 누가 어느쪽이 맞다고 할 것인가. 보통 사람들은 그저 착하게 태어나 잘못 배워 악해진다는 것과 악하게 태어나 잘 배워 착하게 산다는 정도로 이해한다. 극악무도한 사람을 보면 성악설이 맞는 것 같고 보통 사람은 실천하기 어려울 정도로 곱고 착하게 사는 사람을 보면서는 성선설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최근 우리는 성선설과 성악설을 떠올리는 두 개의 큰 사건을 경험 했다. 법정스님의 입적과 김길태의 여중생 성폭행 살해 사건이다. 김길태 같은 흉악범의 이름을 법정 스님과 함게 올리는 것은 대단히 송구스럽다. 인간이 어쩌면 저렇게 맑고 향기롭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스님. 교활하고 추악한 모습에 치가 떨리는 김길태. 선과 악이 극명히 대비돼 인간의 본성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게 한다.

두 ‘사건’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케 한다. 물론 생각의 끝은 스님처럼 맑고 향기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욕심 때문에 흐리고 냄새나는 삶을 살아왔던 것이 부끄럽다. 앞으로는 과연 맑고 향기롭게 살 수 있어야 할텐데 자신이 없다. 처자식도 호의호식하게 해야되고 자존심도 세워야 한다. 마음은 스님의 뒤를 좇으면서도 실천하기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아무 것도 갖지 않으면 지킬 것이 없어 부담이 없고 자연스러우며 자유롭고 편하다는 스님의 말씀은 듣기만 해도 우리를 편안하고 자유로운 세상으로 이끈다. 아무것도 갖지 않겠다는 스님의 삶은 하나라도 더 갖겠다고 아귀다툼을 하는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잘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셨다. 참된 자유가 어떤 것이며 얼마나 편하고 좋은 것인가도 알게 하셨다.

“출가 해서 걸리는 것이 없는 스님은 모든 것을 버리는 삶이 가능하지만 속세인들은 그런 삶이 불가능 하다” 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럴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많은 것을 얻는 것은 선(善)이다. 그것을 어떻게 얻었느냐가 문제다. 선(善)한 방법으로 즉, 열심히 일해서 얻었는지 추악한 방법으로 얻은 것인가가 중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얻은 것을 다시 비우는 것이다. 어디에 어떻게 그것을 쓰느냐 이다.

스님, 스님께서는 스스로까지 버리고자 하셨지만 우리는 스님을 버리지 못하겠습니다. 스님의 맑고 향기로운 삶은 저희들이 스님을 버릴 수 없게 합니다. 속세인으로서 스님의 가르침을 새기며 얻은 것을 어떻게 비우는 것이 스님처럼 맑고 향기롭게 사는 것인가를 항상 잊지 않겠습니다. 지장보살은 마지막 한사람까지 구하신다지요. 부디 김길태와 같은 사람까지 스님의 향기로 구제 받는 세상이 되도록 이 세상만은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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