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自以/ 영광신문 사외 논설위원,향리학회 회원

 영광읍에 있는 성산(城山)에 오르면 거대한 자생 차나무 군락(群落)을 볼 수 있다. 누가 일부러 심거나 힘써 가꾸지 않았는데도 잘 자란 차나무들이 거의 모든 방향의 높고 낮은 능선을 빈틈 없이 뒤덮고 있다. 큰기나무(喬木)들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그 밑의 그늘에서 자라고 있는 떨기나무(灌木)는 대부분이 차나무이다.

 총합하면 면적이 족히 수십 ㏊가 다 될 것 같은 차나무 군락의 광활함과 조밀함은 다른 곳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장관(壯觀)을 연출한다. 차의 고장으로 유명한 보성(寶城)이나 중국 용정(龍井)의 계단식 차밭을 보고 느꼈던 감동과는 또 다른 감동을 안겨 준다. ‘인공(人工)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자생 차밭도 이토록 크게 생성되고 유지될 수 있구나’ 하는 발견을 하고는 자연의 힘과 신비에 또 한 번 압도된다. 또한 그 중 상당한 면적에서는 대나무와 함께 차나무가 자라고 있으니, 대나무 이슬을 머금고 자란 차는 타닌(tannin)함유량이 적어서 맛과 향이 특별히 좋다는 ‘죽로차(竹露茶)도 생산되겠다’는 기대까지 가져 볼 수 있다. 한반도 남쪽에는 곳곳에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다지만 ‘이 곳처럼 규모가 크고 왕성한 차나무 군락을 다른 곳에서도 과연 또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아닌 애착심이 거듭 새로워진다.

 역대 지리지(地理誌)의 기록에 의거하면 예로부터 영광은 차의 생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신동국여지승람』(1530년), 『동국여지지』(1670년)에는 차가 영광의 토산물(土産物)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영광에서는 15세기 중엽 이전부터 17세기 중엽 이후까지 300여 년 동안 차 생산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특히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작설차(雀舌茶)를 생산하여 왕실에 진공(進貢)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영광에서 생산된 차는 품질도 대단히 높게 평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후에 간행된 『여지도서』(1759년)에는 차가 생산되지 않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1865년에 간행된 『대동지지』에는 다시 토산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의 차문화가 임진왜란 이후 크게 쇠퇴했었음과 그 때에는 영광에서도 차 생산이 중단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최근 들어서 차문화는 국제적으로도 크게 진흥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머지 않아 커피문화가 녹차문화로 전환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한다. 국내에서도 차 생산과 차문화를 지역의 핵심 브랜드로 가꾸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일고 있다. 전남 보성과 경남 하동(河東)에서는 이미 지역 브랜드화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해남(海南), 무안(務安) 등지에서도 차문화 진흥을 위한 이벤트를 매년 대대적으로 펼치고 있다.

 우리 지역 성산의 자생 차나무 군락은 문화 자원으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규모 또한 크고 생태 환경까지 양호하니 이용하기에 따라서는 자원을 넘어 보물이 될 수도 있다. 지역에서는 연구와 보호 그리고 투자를 미루지 않고 서둘러야 한다. 차의 브랜드화를 이미 선점한 지역이 있다 하더라고 자연 친화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면 가능성과 경쟁력이 있는 대안이 찾아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차나무 생태체험 등산코스 개발’, ‘채다(採茶) 및 제다(製茶) 실습’ 등과 같은 사업을 생각해 볼만 하다. 굳이 차제품 판매나 외부 관광객을 유치하지 않더라도 지역 주민들에게 차문화 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계기와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다면 그 또한 훌륭한 자원 활용으로 보아야 한다. 방법적인 면에서는 관주도도 좋지만 민간 문화단체의 참여를 권장해 보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지역의 차문화동호회, 등산동호회 등은 훌륭한 선도자가 될 수 있다.

 성산에는 옛 읍성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고 ‘영광8경(靈光八景)’ 중 ‘성산취죽(城山翠竹)’과 ‘서제연류(西堤煙柳)’라고 하는 2경(二景)의 풍류가 깃들어 있다. 만약 ‘자생차나무군락’을 그러한 유적 및 풍류와 연계시켜 문화컨텐츠화 해보려고 한다면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다. 영광 문화의 품격을 높여 줄 만한 결과가 창출될 수도 있다.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