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환/ 영광세무회계사무소장

  이 나라 재벌들의 행태는 보통 사람들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비자금 조성과 불법증여는 ‘애교’ 수준이고 형제간에 죽기살기식 경영권 다툼까지 끊임없이 사건을 일으킨다. 재벌 총수의 어머니가 돈을 어디에 쓰려고 ‘딴 주머니’를 찼을까. 마음껏 돈을 쓰면서 살 수 있을 만큼 돈이 많은 사람들이 거액의 회사 돈을 빼내 숨기는 이유를 서민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알 수가 없다. 999원을 가진 부자가 1000원을 채우기 위해 가난한 사람의 1원을 욕심낸다고 한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이웃을 위해 기부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가수 김장훈과 션· 정혜영 부부의 경우 기부하기 위해 사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배우 신영균 님은 500억원을 기부해 문화 발전에 써달라고 했다. 이들외에도 수많은 ‘기부천사’들이 있다. 하지만 돈 많다고 소문난 사람들의 통큰 기부 소식은 없다. ‘부자가 더 무섭다’는 말이 실감 난다.

  미국이 초일류 국가로 인정 받는 것은 돈이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세계의 부러움을 사는 진정한 이유는 기부 문화가 정착된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최근 세계 최고 갑부로 알려진 두 명의 미국 재벌이 세계의 갑부들에게 재산의 절반 기부를 권장하고 나섰다. 물론 대한민국의 재벌들은 이들의 제안에 대해 못들은 척 하고 있다. 미국 갑부와 한국 갑부의 이같은 차이가 미국과 한국의 차이 처럼 느껴진다.

  뉴욕의 수돗물은 생수를 사 마실 필요가 없을 만큼 최고의 질을 자랑 한다. 하지만 시민들은 수도료를 거의 내지 않는다. 부자들만 조금씩 낼 뿐이다. 석유 재벌 록펠러가 전 재산을 기부해 뉴욕 시민들이 깨끗한 물을 마음껏 마실 수 있도록 했다. 록펠러 재단에서 1년간 뉴욕시에 123조원에 달하는 수도료를 시민들 대신 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나라 있으면 나와봐” 하며 자긍심을 가질만 하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부인이 운영하는 서울 로댕 갤러리에는 로댕이 1884년 제작한 ‘칼레의 시민’ 이라는 조각상이 있다. 프랑스의 ‘칼레’시가 로댕에게 의뢰해 제작한 작품의 12개 판본 가운데 하나다. 이 조각상에 새겨진 6명의 ‘칼레의 시민’은 칼레를 정복한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6명만 처형하고 모든 시민을 살려 주겠다고 하자 스스로 나선 부유층 인사들이다. 부와 권력을 누리는 사람들의 사회에 대한 도의적 의무인 ‘노블리스 오블리쥬’를 실천한 대표적 사례로 꼽혀 유명하다.

  로마 제국은 현대인의 눈으로 보아도 훌륭한 도로와 수도· 경기장· 도서관· 목욕탕 등 공공 시설을 갖추었다. 이같은 사회 기반시설(인프라)은 거의 대부분 황제를 비롯한 지도층이 건설해 기부하고 보수까지 했다. 부와 권력을 누리는 대신 공공의 이익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의무처럼 생각한 것이다. 로마 제국이 초일류 국가로서 천년의 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지도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쥬’의 실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자랑스러운 ‘노블리스 오블리쥬’의 사례가 있다. 3대 가기가 어렵다는 부를 12대 400년에 걸쳐 유지한 경주 최부잣집이다. 최부잣집은 사방 백리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했다. 찾아 오는 손님들에게는 밥과 잠자리를 제공 했다. 대를 이어 지킨 세가지 ‘원칙’이 있었다. ‘흉년에 땅을 사지 말라’ ‘만석 이상 하지 말라’ ‘벼슬은 진사와 생원 이상 하지 말라’ 다.

  ‘흉년에 땅을 사지 말라’는 것은 도덕성 없는 재산증식에 대한 경계다. 먹고 살 것이 없어 팔려고 내놓는 땅을 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만석 이상 하지 말라’는 원칙은 땅이 늘어날수록 소작료를 낮춰 최부잣집이 부유해질수록 소작인들도 부유하게 만들었다. 이웃이 편해야 나도 편하고, 어렵고 힘들 때 이웃과 함께한다는 상생의 정신, 즉 ‘노블리스 오블리쥬’의 실천으로 쌓은 덕망이 12대 400년에 걸쳐 부를 누린 ‘비결’ 이었던 것이다. 높은 벼슬을 하지 말도록 한 것은 당파 싸움으로 인한 화를 예방한 지혜다.

  ‘칼레의 시민’에 못지 않은 ‘노블리스 오블리쥬’의 표상도 있다. 영조때 낙안군수 유이주의 고택인 구례군 토지면 운조루에 있는 뒤주다. 아무나 열어 쌀을 퍼가도 된다는 뜻인 타인능해(他人能解)가 새겨져 있다. 세계에 자랑할만 한 ‘노블리스 오블리쥬’의 표상이다. 갑부들이 최부잣집과 운조루의 뒤주를 보고 그 상생의 정신을 배워 실천한다면 더 많은 부가 쌓일 것이다. 법을 어기지 않아도 자손 대대로 부를 지킬 수도 있을 것이다. 존경 받는 기업인이 될 것이고 따라서 사업도 더욱 번창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지도층의 입에서 ‘국격의 상승’과 ‘선진국 진입’이라는 말이 유난히 많이 나왔다. ‘지도층’이 아닌 국민들을 보면 우리나라의 국격은 상승됐고 선진국 국민들의 수준에 못지 않다. 중소기업이나 소규모 장사를 하는 사람들과 월급장이들은 성실하게 세금을 냄으로써 ‘노블리스 오블리쥬’를 실천하고 있다. 물질로 남을 돕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봉사활동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쥬’를 실천하고 있다.

  국민들은 이러한데 ‘국격’과 ‘선진국’을 떠들어 대는 ‘지도층’ 인사들은 부도덕한 모습을 더 많이 보이고 있다. ‘국격’은 돈 좀 가졌다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경제 규모가 커졌다고 선진국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다. 지도층 인사들이 경쟁적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지 않는 한 국제사회는 대한민국의 국격을 그렇게 높게 쳐주지도 않고 선진국으로 인정해주지도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조국의 국격상승과 선진국 진입을 간절히 원한다. 부족한 것은 지도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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