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 황소의 울음소리-토마스 아퀴나스

 영광 백수 출신/ 광주교육대학교 교수/ 철학박사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 출신인 토마스의 가족들은 막내아들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성직자의 길을 가는 데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그를 나폴리에 있는 까시노 수도원으로 보냈다. 당시 수도원장의 자리에 있던 큰아버지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큰아버지의 넓은 땅을 상속받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토마스는 탁발(托鉢, 마을을 다니면서 음식을 구걸하는 일)수도승들에게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에 그의 어머니는 두 형들을 시켜서 그를 잡아다가 성에 가두고 말았다. 그리고는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토마스는 막무가내였다.

 그러자 가족들은 그의 계획을 단념시키기 위해 예쁘게 차려 입은 젊은 여자를 창부(창녀)로 꾸며 그의 방에 들여보냈다. 그러나 남녀 사이에 있음직한 즐겁고도 황홀한 시간을 기대했던 이 젊은 아가씨는 몸집이 거대한 젊은 남자(토마스)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자기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의 손에는 방금 벽난로에서 끄집어 낸 불붙은 장작이 들려 있었다. 그녀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음은 물론이다. 이와 같은 토마스의 확고한 태도에 감동한 그의 누이들은 그를 광주리 속에 넣어서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 곳에 갇힌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토마스는 보통의 철학자들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도 거대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책상은 그가 앉아서 공부할 수 있도록 둥글게 홈을 파 놓아야 할 정도였다. 또한 별로 말이 없었기 때문에 동료들은 그를 ‘벙어리 황소’라고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동료 학생이 미련스럽게 보이기만 한 이 친구에게 보충수업을 해주려 덤벼들었다. 그러나 토마스는 어느 유명한 교수보다도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깜짝 놀란 이 친구에게 토마스는 이 일을 절대로 비밀에 부쳐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의 능력을 알아차린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위대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그의 스승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토마스를 벙어리 황소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 이 벙어리 황소가 한 번 울부짖으면 그 소리의 진동이 전 세계에 가득 울려 퍼질 것이다.”

 스승의 예언은 적중하였다. 결국 토마스는 파리 대학의 신학교수로 취임하게 되었고, 그의 예리함과 박식함은 당시 대학 전체의 화제 거리였다. 그가 이끄는 토론시간에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동료교수들까지도 모여들었다.

 토마스는 왕의 간청에 의해 고국인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조용한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신학대전>을 완성하려는 집념 때문에 여기에서도 쉬지를 못했다. 그러던 중 <신학대전> 제3부를 쓰고 난 뒤, 망아(忘我)상태에서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오늘 내가 본 것에 비하면, 지금까지 내가 기록해온 것은 한갓 티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펜을 던지고 쓰러졌다.

 그의 때 이른 죽음은 도보여행에서 찾아왔다. 교황으로부터 리용 종교회의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토마스는 걸어서 여행을 하다가 쌓인 피로 때문에 병을 얻었고, 결국 테라치나의 한 수도원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도미니코 수도원의 훈련 내용에는 ‘아무리 먼 곳일지라도 모든 여행은 반드시 걸어서 다니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토마스는 그의 온화한 성품으로 인하여 살아생전에 ‘천사와 같은 학자’로 칭송 받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사상은 도미니코회의 공인된 철학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사후 50년에는 그 자신이 성인의 반열에 올려졌다. 서양 중세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토마스(1224년-1274년)는 기독교 교회와 그 교리를 옹호하는 데 노력하였고, 대저서 <신학대전>에서 웅대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수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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