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학문의 갈림길에서-베이컨

영광백수 출신/ 광주교육대학교 교수/ 철학박사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외쳤던 영국의 철학자, 그가 바로 베이컨이다. 하지만 베이컨은 열두 살 때에 입학한 케임브리지 대학을 자퇴하고 말았다. 그곳에서 중세 스콜라 철학을 공부하도록 강요받은 데 대해 불만을 터뜨린 것이다. 그 후 영국 대사관의 수행원 자격으로 프랑스 파리에 가서 삼 년 동안 머무르며 문학과 과학을 공부하였다.

이 동안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고국으로 돌아와 보니 유산은 이미 큰어머니에게서 난 세 자녀와 손위 형들에게 거의 상속되어 버렸고, 막내인 그에게 돌아오는 몫은 없었다. 이미 사치스런 생활에 길들여져 있었던 그에게 가난은 무척이나 견디기 힘들었다. 공무원으로 출세해볼까 하고 당시 수상인 큰아버지를 비롯하여 가까운 친척들에게 취직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냉담하기만 하였다.

스스로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해나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베이컨은 스물한 살에 변호사 자격증을 따냈다. 2년 후에는 영국 타운톤 시의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그 후 선거 때마다 승리하였다. 당시 여왕의 애인이라고까지 소문이 난 에섹스 남작에게 접근하여 그의 신임을 얻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반란을 추진하다가 체포된 남작을 위해 끈질기게 변호하였고 마침내 가출옥으로 풀려나게까지 해주었다. 그러나 에섹스 남작이 또다시 반란사건을 주동하여 체포되자 당시 검사국에 근무하던 베이컨은 그에게 반역죄를 적용하여 사형언도를 받도록 하였고, 그리하여 결국 남작은 처형되고 말았다.

문필가로서의 명성까지 얻은 베이컨은 마흔 다섯에야 시 참사 의원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사치스런 결혼생활 때문에 몇 년 가지 못해 부인이 가지고 온 지참금까지 다 써버리고 빚에 쪼들려 채권자들을 피해 다녀야 했다. 하지만 여왕이 죽고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또다시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검사차장과 검사장을 거쳐 검찰총장이 되더니 1616년에는 추밀원 고문관, 이듬해에는 궁정대신,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왕 다음의 관직인 대법관으로까지 그야말로 초고속 승진을 하였다. 물론 이에 대해 돈 뭉치를 뿌리는 그의 처세가 효과를 발휘한 것이라고 입방아를 찧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법관이 된 지 3년 만에 재판결과에 불만을 품은 어떤 소송인이 그를 뇌물수수죄로 고소하고 말았다. 결국 그는 유죄판정을 받아 공직을 박탈당한 채, 런던탑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4일 후에 왕의 사면으로 석방되고, 4만 파운드의 벌금도 면제받았다.

그 후 베이컨은 고향으로 내려와 조용히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얼마 후에는 국왕으로부터 다시 정계에 복귀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정중히 사양하였다. 그러던 중, 1626년 3월 런던에서 하이게이트로 가는 길에서 ‘과연 고기를 눈(雪)속에 묻어두면, 얼마 동안이나 썩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는 당장 이것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즉시 어떤 농가에 들어가 닭 한 마리를 사서는 배를 가른 다음, 털을 뽑아서 눈 속에 묻었다. 그러는 동안 온몸에 피로와 오한이 몰려들었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집으로 돌아갈 수조차 없었다. 그는 결국 가까운 아런델 경의 저택으로 옮겨졌는데, 그곳에서 영영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65세 때였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실험은 훌륭하게 성공하였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글이 되었다.

영국 유물론의 시조라 불리는 베이컨(1561년-1626년)은 정치에 관여하려는 야망과 학자 내지 문필가로서 크게 성공해 보려는 욕망의 두 갈래 길에서 끊임없는 갈등을 겪고 있었다. 결국 그는 잠시 공직에서 은퇴한 기간에만 학문이나 문필활동에 종사하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치영역에서 얻은 명성보다 학문 분야의 활동을 통하여 오래도록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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