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기/ 시인

태풍이 바닷물을 회 치 듯 쓸고 갔다.

성질이 사나워진 물살이 솟구쳤다.

후쿠시마 쓰나미 영상이 부셔지는 것을 느꼈다.

필름이 끊어져 짤려 나간 한 토막 그 간극에 영광 원전 반핵의 상처가 뭉그러져 짧막한 흑백으로 지나갔다.

누구는 배반의 한수원 자객이 되어 뒤를 쫓고 몇 남았던 동지들 흩어지고 핵폐기장 싸움 하던 박 시인은 구금 후 도일을 했다.

방한 했을 때 일본 원전 가까운 곳에 산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도 같고 센다이를 자주 되내이었던 것도 같고 검고 낮은 집들 아득하고 막막하기만 한 잿빛 꼼꼼한 일인들의 생활이 숨막혔다고 술국을 들이끼던 것이 자꾸 떠올랐다.

핵폐기장 논쟁이 영광에서 부안으로 넘어가던 날 핵폐기 드럼통을 트럭에 싣고 부안 군청 앞에서 나는 촛불 시위 방법을 일러주고, 지원금 허위를 고발하고 급하게 머리를 박는 투쟁보다 한 사람이라도 내 편의 주민을 모으는 싸움을 하라고 트렉터 위에 올라 설명 하고 박 시인은 두껍고 우렁찬 반핵 구호로 부안 주민을 선무했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었다. 나는 94년 촛불 시위와 소등 운동을 반핵시위에, 민중이 함께하는 운동을 창안하며 3, 4호기 안전성 촉구, 5, 6호기 건설 중지, 핵폐기장 철회까지의 10여년이 넘는 장정이 다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박시인은 우리를 속박했던 적들을 척단할 수 없는 것을 분개하며 떠났다.

나는 혼자 남았다. 온통 경제 논리와 친 찬핵분자들 속에서 고립되어 갔다. 비굴하게 살았다.

저항하지 못했다. 정신이상자가 되어 있었다. 타협도 못하고 저항의 눈빛도 잃어버린 무기력, 우리보다 내진 설계가 잘 되었다는 일본에서 그것도 우리보다 우월하게 관리되고 있고, 군 관계자나 주로 반핵의 논리를 이론적으로 대응하는 유지나 단체장들 언론인들이 답사하는 후쿠시마에서 원전이 폭발한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옳았고, 우리의 주장이 진실이었고, 우리의 속박이 억울했던 것이 해방되는 기분은 인간이기에 그 비극의 아비규환 속에서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 원전의 구조가 사각 구조물이라 피복제가 산화하면서 발생한 수소가 모서리에 차면서 폭파하였고 우리 원전은 돔 구조라 안전하다는 전문 원자력 교수의 둘러대는 허위를, 제트기류를 무시한 채 동풍과 편서풍이 안전을 지켜준다는 거짓 증언을 저항 없이 듣고 있었다.

원전은 늘 그랬듯이 결과만이 그를 증언하여 준다.

나는 삼 백만은 피폭되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진정되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회유하는 해류와 물고기도 위험하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까나리 등 젓갈류가 관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 입에서만 맴돈다. 촛불을 들고 벽시를 쓰고 걸개 반핵시화를 만들어 걸고 핵돔 장례식을 치루고 핵드럼통을 쌓아 반핵 촛불탑을 만들고 아! 그 앞에서 박 시인과 둘이 반핵 구호를 외치던 60일 폐기장 투쟁 그가 사는 땅이 쓸려가고 있었다.

그가 말하던 그 쓸쓸하고 먹먹한 검은빛을 바다가 되집어진 흙탕물에 휩쓸리고 있었다.

영광 원전에 항거하던 일보다도 우리를 배반하고 우리를 이 땅에서 내몰려던 멸시와 음모와 배반보다도 천 배 만 배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떠나지 못했고 그는 살아 있는지 아내와 아이들은 안전한 지 알 수가 없다.

내가 그의 적들과 석여서 끝내 비굴하게 살아 남은 게 죄가 된 것인가 나는 더 아픈 죄책과 고독의 독방에 갖혀야 하는가 그가 떠난 뒤 나는 내 죄목의 조서를 스스로 받고 있었다.

우리는 서서히 오염이 되고 피폭 되어 썩어간다. 우리는 그렇게라도 살아야 한다. 나의 슬픈 동지여 살아만 있어다오.

젊은 날 우리가 만들어 우리가 들었던 반핵 촛불을 우리의 재회의 상위에 세워놓고 그 촛불 다 사위어 갈 때까지. 바라 볼 수 있기를 방파제에 선 나를 메아리가 때리고 있었다.

시멘트 벽을 타고 오르는 작은 쓰나미가 지난날의 내 회상을 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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