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근/ 언론인, 프리랜서

“국민도, 언론도 안중에 두지 않아도 됐다. 오직 공천만 바라보며 뛰었다. 당리당략에 몸 바치는 3류정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두 당의 변화에 국민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동영이 전주 불출마를 선언 했다. 다른 호남 중진들도 용단을 미루다가는 불명예를 안게될 것이다”

15대 총선을 앞둔 95년 말. 3선을 눈앞에 둔 민주당 정상용 의원은 돌연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아갔다. “서울 서초 갑에 출마 하겠습니다” “다시 생각하세요” 정상용은 더 이상 부끄러워 광주에서 출마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누구보다 ‘행복한’ 국회의원 노릇을 8년이나 했으나 더 이상은 ‘따 놓은 당상’ 벼슬을 하는 것은 남자답지도 못하고 당이 정권을 잡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 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수 성향이 강한 서초 갑에서 출마하는 것은 스스로 국회의원에 당선되길 포기한 것과 같다. 정상용은 부와 권력이 주어지는 국회의원이란 벼슬을 이렇게 던졌다. 5·18 주역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그와 공천을 다투는 인사도 없었다. 재야운동권과의 창구 역할을 맡아 DJ의 신임도 두터웠다. 광주 서구에서 공천을 받아 3선 국회의원이 되는 데 아무 걸림돌이 없는데도 그는 스스로 ‘백수’의 길을 선택 했다.

DJ의 거듭된 만류에도 당이 정권을 잡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부끄럽지 않은 정치인’으로 남기 위한 선택 이었다. DJ는 자신의 집권에 도움이 되기 위해 어려운 길을 선택한 정상용에게 고마워했고 항상 걱정 했다는 후일담이다. 그의 추천으로 광주서구를 물려받은 정동채는 이후 3선 의원과 문광부 장관을 역임하는 영광을 누렸다. 정상용이 누릴 ‘호강’을 정동채가 누린 것이다. 정상용은 지금도 처자식 고생만 시키고 있다.

호남 지역에서는 민주당 공천이 곧 당선이다. 당분간 이 같은 ‘공식’은 깨질 것 같지 않다. 그러니 정치인들은 공천만 바라보고 뛰었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었다. 언론 보도에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당선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당에서 적당히 처세만 하면 됐다. 국민이 안중에 없는 정치인들이 하는 정치란 뻔하다. 당리당략에 몸을 던지고 거수기 역할만 충실히 했다. 결국 3류 정치이었다.

보수와 진보를 바꿔가며 정권을 맡겨도 시원치 않은 정치에 드디어 국민들이 화를 냈다. 국민들이 아닌 그들만을 위한 정치 행태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정치에 입문하지도 않은 안철수 교수를 차기 대통령으로 뽑겠다고 하겠는가.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움직임이 마치 호떡집에 불난 듯하다. 한나라당은 쇄신을 택했고 민주당은 야권 통합을 위해 간판을 바꿔 달았다.

한나라당은 물갈이, 즉 인적쇄신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거물’들을 포함한 50% 정도는 물갈이 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민주당이다. 간판 바꿔 다느라 소란만 떨었다. 역대 최대 선거인단에 의한 지도부도 선출 했다. 여기까지는 그들만의 정치 행위다. 이제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선택 받을 수 있는 메시지를 띄워야 한다. 과거 정치에 대해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정당으로서 확실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과거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정치인 개개인의 움직임만 봐서는 국민들의 실망을 살 것 같다. 과거 정치에 대한 책임과 새로운 정치를 위한 불출마 선언이 한나라당에 비해 시원찮아서다. 얼마든지 다시 공천을 받을 수 있고 당선도 확실한 정장선 사무총장과 김부겸 의원이 각각 불출마와 대구 출마를 선언한 정도다.

다행히 정동영 의원이 전주 불출마를 하고 나섰다. 거물다운 결정이다. 호남 중진들에게 그의 뒤를 따르라는 신호다. 행복한 국회의원 생활을 해온 호남 중진들의 거취가 주목된다. 자진해서 ‘취약지역’으로 가거나 불출마 선언을 하는 것이야말로 영광스러운 선택이다. 아니면 타의에 의해 정치판을 떠나는 불명예를 안게 될 것이다. 정상용의 선택을 되돌아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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