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가정환경 극복, 인권변호사로 활약

“권위주의 지역주의 타파…지방분권 대공로”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2003년 2월 25일-2008년 2월 24일) 노무현(盧武鉉)!

본관이 광주(光州)인 노무현은 1946년 8월 6일(양력 9월 1일) 아버지 광주 노씨 노판석과 어머니 이순례의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現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30번지) 봉하(烽下) 마을의 빈농 집안에서 출생했다. 노무현의 종증조부 노응규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였다.

노무현은 학업 성적이 우수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966년 졸업하였다. 졸업 이후 농업협동조합의 입사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하였으나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과 발등을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하여 그만두었다.

노무현은 야심차게 사법시험을 준비하다 1968년 육군에 입대하여 육군 제 12사단(을지부대)에서 1971년 육군 상병으로 만기 제대했다. 노무현은 재차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중 1973년 1월 동향이자 초등학교 동창인 권양숙(權良淑) 여사와 연분을 맺는다. 1973년에 아들 노건호, 1975년에 딸 노정연을 낳았다.

노무현은 유신 시절인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이는 네 번째 도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야말로 감개무량이었다. 노무현은 당시 사법시험에서 유일한 고졸 출신 합격자였다. 노무현은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7개월만인 1978년 5월 사직하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다.

 

5공 청문회 스타…숱한 난관에도 ‘집권’

민주화와 인권에 앞장서 온 노무현은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과의 인연으로 1988년 4월 26일 제13대 총선에 통일민주당 후보로서 부산 동구에서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5공 실세인 허삼수씨와 맞붙어 위풍당당 국회에 입성하였다.

노무현은 1988년 11월에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초선의원으로 맹활약을 보인다. 전 국가 안전 기획부장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 안현태, 전 법무부장관 이종원,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 등을 상대로 한 증인 신문에서 차분하고 정연한 논리와 날카로운 질문으로 일거에 ‘청문회 스타’ 반열에 올라섰다.

노무현은 김영삼 바람이 휘몰아친 1992년 3월 24일 14대 총선에서 민주당 타이틀로 지역감정에 맞서 부산 동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의 고배를 들면서 재선에 실패한다. 그럼에도 동서화합의 필요성을 국민들에게 심는 분기점이 되었다.

민주당 후보로서 노무현은 1995년 6월 27일, 34년 만에 부활한 초대 민선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36.7%의 득표율을 얻었으나 결국 지역감정의 벽을 뚫지 못하고 역시 낙선했다.

1998년 2월, 한나라당 의원 이명박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형을 최종 선고 받기 직전 서울특별시장 경선 출마를 선언하며 의원직을 자진 사퇴하였다. 이에 1998년 7월 21일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노무현은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의 정인봉 후보를 물리치고 6년 만에 국회에 복귀한다.

2000년 4월 13일, 제16대 총선에서 노무현은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며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서울시 종로구 공천을 물리치고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결국 낙선하였다.

이어 노무현은 김대중 정부에서 2000년 8월부터 2001년 4월까지 해양수산부장관을 지냈다.

드디어 노무현에게 대권의 꿈을 정조준할 결정적 기회가 찾아왔다. 흥행몰이에 성공한 ‘국민경선제’이다. 16부작 정치 드라마로 불렸던 국민 경선제는 2002년 3월 9일부터 제주를 필두로 전국 16개 시도를 돌면서 당원(50%)들과 국민(50%)들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노무현은 2002년 11월 18일, 국민통합21의 대통령 후보인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뒤, 텔레비전 토론을 거쳐 2002년 11월 24일 단일화 여론 조사에서 극적 승리했다. 리서치 앤드 리서치 경쟁력 조사에서 46.8%를 얻어 42.2%를 얻은 정 후보 우위에 선 것이다.

노무현은 2002년 12월 19일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선거 결과 총 3499만 1529명의 유권자 가운데 유효투표 총수 2476만 141표 가운데 1201만 4277표(48.91%)를 얻어 1144만 3297표(46.59%)를 얻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57만 980표(2.3%) 차로 누르고 당선되어 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참여정부 혁신적 개혁 ‘명암 엇갈려’

2003년 2월25일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공식 출범한 참여정부는 1987년 10월 개헌을 통해 제6공화국이 탄생한 이후의 4기 정부이다.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문민정부'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국민의 정부'란 이름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노무현 시대의 주축인 참여정부는 정의롭고 합리적인 개혁정부, 국가적 갈등 구조를 해결하는 국민통합 정부, 국민과 수평적·쌍방향적으로 소통하는 열린 정부, 모든 국민에게 꿈과 용기를 주는 희망의 정부를 지향하였다.

참여정부는 지방분권을 정부혁신과 대등한 차원에서 추진했다. 이에 지방분권특별법과 국가균형발전특별법을 제정하는 등 지역균형과 지방분권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많은 중앙행정 권한을 지방으로 이양하였다.

우리나라 지방정치와 지방행정 역사에 있어 큰 획이라 할 수 있는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하였고, 국토의 일부분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자치경찰제도가 시행되었다. 주민투표제도와 주민소환제도 등 지방정부의 자기 책임성을 강화할 수 있는 제도들이 시행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2박3일 동안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하였다.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평양에서 김대중과 김정일 간 첫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회담이므로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라고 한다.

10월 3일 남북정상은 첫 회담을 열었고, 10월 4일 6·15남북공동선언에 기초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약칭 2007 남북정상선언문)을 채택하였는데, 현실적 내용으로는 다음의 내용이 포함된다.

민족경제의 균형발전과 공동번영을 위하여 경제협력사업을 적극 활성화하고 지속적으로 확대 발전시켜 나간다. 이를 위하여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고, 경제특구를 건설하며, 한강 하구를 남과 북이 공동으로 이용한다. 백두산 관광을 실시하고 서울과 백두산을 연결하는 직항로를 개설한다.

2006년 1월 18일 노무현은 대국민 신년연설을 통해 한미 FTA 협상을 공론화 한 가운데 1년을 넘긴 2007년 4월 2일 한미 FTA를 타결 지었다. 6월 16일 미국 측에서 노동, 환경 등 7개 분야의 수정안을 요청하여 6월 21일부터 FTA 추가협상을 개최하여 6월 29일 최종 마무리 지었다.

노무현은 보수 진영으로부터는 친북좌파라는 비난을, 진보 진영으로부터는 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에 시달리면서 또한 언론 권력의 전횡에 문제 제기를 하면서 언론과의 관계도 순탄치 않아 비주류로서의 파란 많은 정치 역정의 길을 걸어야 했다.

참여정부 혁신의 가장 큰 특성 중 하나는 이전 정부와는 달리 구조나 조직위주의 개혁을 시도하기보다는 문화와 행태를 메스를 가하는 개혁을 추진했다는 점이다.

노무현은 2008년 2월 24일 대통령 임기를 마친 뒤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의 봉하(烽下) 마을로 귀향한다. 봉화산 봉수대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봉하마을'이라 이름 지어졌다. 2009년 4월 30일 검찰의 박연차 정관계 로비 사건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전직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5월 23일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는 요지의 유서를 남기고 사저 뒷산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하여 62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2004년 영국 왕실로부터 최고훈장인 ‘바스 대십자훈장’을, 2007년 카타르 정부로부터 독립대훈장을 받았으며, 著書로는 자전적 일대기인 ‘여보, 나 좀 도와줘’(1994)를 비롯하여 ‘노무현이 만난 링컨’(2001),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2002), ‘운명이다’(2010) 등이 있다.  /소정현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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