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호/ 시인

유난히도 덥고, 유난히도 비도 많이 온 긴 여름이 지나고 아침 저녁 제법 선선한 가을 바람이 불어오는 919, 음력 815일 추석을 보냈다. 추석 앞 뒤로 하루씩 쉬어서 3일간 공휴일에 올해는 공휴일 바로 뒤에 토요일과 일요일이 따라 붙어서 연휴가 5일이 되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이 공휴일이 되면 그 다음 날도 쉬는 대체 휴일제가 적용되어서 내년에는 11년만에 제일 많은 67일이 휴일이라고 한다.

농촌에서 자라면서 추석을 보낸 50대 이상의 세대들에게는 추석이나 설날은 남다른 추억들이 많다. 배고프고 가난에 찌들었어도 명절이 돌아오면, 설레임으로 모두가 웃음을 띄고 마음을 너그럽게 먹고 가족과 친지들을 생각하고 이웃과 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으며 풍족한 시간을 가졌다. 정과 사랑을 나누는 넉넉한 만남과 소통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서 조상들을 생각하고 감사하고 추모하는 귀한 시간이다. 이마에 늘어난 주름과 머리에 내린 하얀 서리같은 머리칼도 바라보면서 그 동안 지낸 안부도 서로 묻고 앞으로의 당부도 하고 성공과 행복도 빌어주는 따뜻하게 열린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로부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전해 온다. 날씨도 덥지도 춥지도 않는 선선한 가을 날씨이고, 여름에 땀 흘려서 가꾼 햇과일과 농작물도 일부 맛볼 수 있고, 뿔뿔이 흩어저 사는 가족과 형제자매, 친지들도 만나서 덕담을 나누고, 먹고 살기 바빠서 소원했던 이웃들과도 정을 나눌 수 있는 푸근한 인심을 가질 수 있는 명절이 추석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추석에 남모르게 한숨 짓는 사람들도 많다. 자식들이 없거나 있어도 찾아보지 않는 요양원이나 보호시설에 살고 있는 노인들도 있고, 삶이 힘들어서 형제자매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고향을 찾아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추석 후에 있을 예정이던 이산가족 상봉 행사도 연기 또는 무산되었다. 오랜 만에 남북에 흩어저 사는 이산가족들이 간절히 고대했던 생사 확인과 서신 교환, 직접 상봉의 기회가 또 다시 성사되지 못한 것이다. 가슴 살레이며 기다리던 이산가족들의 실망과 고통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것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체제가 무엇인지, 인도적인 만남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21세기 냉엄한 분단 현실의 우리 조국이다. 누구를 탓해야 할까. 협상이 결렬되면 남북이 서로 비난하고 책임을 떠넘기는 전철을 되풀이하는 일을 언제까지 지켜 보아야 할 것인지,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 막힌 곳을 뻥 뚫어 주어야 할 정치는 서울시청 광장에 설치된 천막당사에서 제1야당 민주당 김한길 대표가 노숙투쟁을 벌이고 있는 불통(不通)의 정치가 오늘 대한민국 정치의 현주소이다.

나는 다른 귀성객들처럼 가족이 함께 고향에 내려가서 예초기로 벌초를 하고, 추석날 아침엔 차례(茶禮)를 지내고 성묘를 했다. 고향에 내려가는 귀향 행렬은 고속도로가 정체되어서 전주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야 했다. 서해안고속도로가 없을 때에는 영광굴비로 유명한 전남 영광(靈光)까지 가는 데에 열 시간이 넘을 때도 있었고, 심지어 고속도로 휴게소에 자동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는 때도 있었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은 정체된다 해도 아주 양호한 편이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아무도 없는 넓다란 빈집에 들어서면,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얼굴과 집안 곳곳에 배어있는 부모님의 체취가 나를 사로잡는다. 살아 계셔도, 돌아가셔도 부모님은 나에게 영원한 고향이요, 내 존재의 뿌리이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불효 막심했던 나의 많은 언행이 나의 가슴을 송곳으로 찌르는듯이 아프다. 저절로 기도가 나오고, 목이 메이며 부모님을 부르게 된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다음에야 조금이나마 자신을 성찰할 수기 있고, 조금이나마 부모님의 크신 은혜를 절절히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잘못이며 큰 모순인가.

이제야 조금이나마 철이 들다니,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없는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살아 계실 때, 정신 차려서 잘 해야 한다. 장인 어르신도 돌아가시고, 홀로 계신 장모님을 뵈러 광주에 가서 처가 쪽 형제자매 가족들과 어울려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전남 화순(和順) 안양산 휴양림에서 초등학생부터 60대 장년까지 두 개의 혼성팀을 짜서 축구, 릴레이, 발 야구, 족구를 하는 맛은 참 기쁘고 귀한 경험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자라나서 찾아갈 시골 고향이 없어서 서울 근교 산을 등산하거나 유원지를 찾아다니며 추석 연휴를 보낸 사람들도 많다. 부모님이 추석 전에 서울로 올라와서 자녀들이 고속도로가 주차장 같은 교통 지옥을 면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고도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정보화·글로벌 세계화가 트렌드가 되는 세상이 된다고 해도, 우리 존재의 근원적인 뿌리인 조상님()과 고향()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찾아가는 행렬은 결코 끊이지 않고 이어질 것이다. 피는 부모님과 씨족, 민족과 인종으로 넓혀지고, 흙은 고향과 지역, 고국(국가)과 대륙으로 확장된다..

역설적으로 너와 나의 현실 속의 삶이 고달프고 팍팍할수록, 어릴 적의 추억과 생명의 뿌리는 더욱 소중하고 위안과 활력소를 주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가끔 앞만 바라보지 말고 뒤도 돌아보아야 하고, 옆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쫓기듯이 무지개 꿈을 쫓아서 앞으로 질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과 가족, 선조와 이웃을 생각하고 응시할 필요도 있다. 평화와 향복을 열망하는 8천만 우리 겨레 모두에게 지친 삶에 휴식과 활력소를 주는 명절이 되고, 삶의 힘과 빛을 재충전하는 소중하고 아름가운 명절이 되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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