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원/ 여민동락 공동체 대표살림꾼

인문은 '인간의 인간다움' 또는 '인간애'를 뜻하는 라틴어 후마니타스(humanitas)에서 온 말이다. 단순화하면 인문학은 결국 인간학이다. 인간에 대한 자각, 즉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그 답을 찾아가는 성찰과 배움의 과정이다.

성찰과 배움이 삶을 지탱하는 내면의 힘을 키워준다고 할 때, 인간의 삶에 대해 성찰하는 인문학은 우리 사회와 시대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자기역량을 키워주는 학문이라 할 수 있겠다. 현대는 성장중심의 결핍사회였던 산업화시대를 지나면서 수많은 문명적 난제에 부딪혔고, 그 과정에서 온갖 가치와 문화가 충돌하고 있다.

여기서 인문학은 이러한 충돌이 쏟아내고 있는 복잡하고 심각한 갈등들을 해소할 정신적 근육의 튼튼한 바탕이 되고 있다. 이것이 전국 곳곳의 기업과 지자체에서 인문학에 주목하고 있는 이유다.

개인은 아파트 평수를 늘리고 자동차 배기량 늘리는 걸 최고의 꿈으로 삼고, 국가는 과학기술강국, 경제대국만을 목표삼아 내달리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를 온전히 잃어 버렸다. 왜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않고 오로지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생각없는삶을 살고 있는 형국이다.

익히 알다시피 이미 대한민국은 GDP 순위로만 따지자면 이미 선진국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들은 행복하지 않다. 그래서다. 인간다움에 초점을 맞춘 인문적 가치를 통해 그동안 물신주의에 빠져 정신없이 살아왔던 우리의 삶의 모습을 냉철하게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 때다. 이것이 바로 인문학의 출발이다.

세월호 참사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가치와 공동체의 안전이 자본의 탐욕과 권력의 구조적 모순에 밀려나면서 사고는 벌써 오래전부터 예견되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뼈저린 자기반성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사유와 성찰이 없다면 제2, 3의 사고는 불가피하다.

더 이상 동일한 사고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타락한 가치에 맞서 인문정신의 성숙이 필요하다. 폭넓은 성찰과 사유를 통해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근본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고 공동체가 반듯하게 설 수 있는 해법을 찾을 수 있는 지름길이다.

이렇듯 인문정신의 성숙을 위해 무엇보다 지자체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만일 영광군이 마을인문학, 농촌인문학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지역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의 궁극적 목적은 살기 좋은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나를 반듯하게 세워 마을공동체를 이롭게 하는 것, 나의 인성을 통해 공동체를 아름답게 하는 것, 이것이 마을인문학이다.

인문학 마을 만들기부터 시작하면 된다. 인문학을 통해 개인과 가족을 넘어 공동체의 최소 단위인 마을에서 사람 사는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마을공동체 회복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지자체는 주민들이 직접 마을의 고유하고 독창적인 인문학적 자원을 발굴해 이를 공동체 활성화 사업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돕는다. 그리고 지역의 사회단체, 학습동아리가 생활에 밀착된 풀뿌리형 인문학사업을 스스로 기획해 운영하게 한다.

인문학아카데미, 인문학 스토리텔링사업, 마을로 찾아가서 즐기는 현장 속의 인문학당 등 시도할 계획은 풍부하다. 저 가난한 시골마을 경로당에 한 밤중에 가득 모여 인문학을 공부하는 원로 농부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인문학당 강좌를 듣기 위해 면사무소 강당을 가득 메운 주민들, 그 마을의 꼬마들부터 백발의 어른들까지 어울리는 풍경을 꿈꿔 보시라.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

중심에 주민을 세우고 사람, , 살림의 근본을 제대로 뿌리내리는 일을 우선시하는 지역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바로 인문정신이고 인문학이다. 주민들 속에 본래부터 존재하던 '더 깊은 선의 뿌리'를 낙관하고, 좋은 사람과 좋은 체제의 선순환을 이뤄가려는 모양새를 갖추는 일, 그것이 바로 마을인문학의 출발이자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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