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기/ 민예총 영광지회장

영광은 근대 개화기를 전후해서 민족운동과 항일운동이 분연히 일어나 전남 어느 군보다도 문화적 자각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지방과 중앙이 직접 소통하고 중앙의 문화 예술은 지방의 장인과 예능인이 없이는 안되었습니다.

일제 강점 안에서의 우리 굿판 협률사의 활동은 그 대표적인 예로써 신기에 가깝던 이곳 출신 김오채 장구와 전경환의 쇠와 공옥진의 창무를 배태시켰습니다.

다시 말해서 중앙 무대는 지방 예인의 무대였고 당대의 예술은 지방 예인들의 참여와 공급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어찌 보면 뼛속까지 예인인 전승 세습 기능은 한양의 굿판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것입니다.

요즘과 같은 연예 기획사에서는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는 전승 예능인들이 판을 짰던 협률사는 그 격이 어느 정도 높았었는가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협률사의 풍물굿 활동은 우리 굿판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마터면 일제 강점기에 끊어질 수 있었던 전통 문화들은 당대 예인들의 핏속에 잠복되어 있다 결국 판이 짜지면 분출하였던 것이니 협률사라는 판은 일종의 민족운동이고 우리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문화 운동이었습니다.

다행히 호남 서남도 농어촌 마을인 영광에서는 훌륭한 풍물 재인들을 있었습니다. 어찌 그분들의 가락과 연희와 창무가 우연한 것이었겠습니까. 염산 젓갈 내음 갯바람과 법성포 성어기의 조기 파시 깃발소리와 백수 너른 뜰의 소금빛과 막바대 질항아리 빚던 마을의 황토빛 서정이 바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느 고을 마다 굿이 있었고 그 굿들은 그 지역에 맞는 독자적인 가락을 만들었고 그 속에서는 탁월한 예인들이 탄생했습니다.

이제 협률사의 예술 정신과 기예 전승과 역사적 탐구를 영광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협률사다라는 제 4회 학술 대회를 치하해 마지않습니다. 김오채 전경환의 풍물과 판굿을 이어 전수하고 있는 최용 우도농악 계승자의 노력이 큽니다.

이는 영광이 명실공히 우도 농악으로 국한되어 있는 굿판을 뛰어 넘어 전국 최고의 전통 예술 고을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리라 믿습니다.

영광은 문학에서는 시 수필 소설 등에서 호남의 선두였고 종교적으로도 원불교 성지이고 천주교 전남 최초 박해지고 기독교가 제일 먼저 들어 왔던 곳입니다. 백제 불교의 최초 도래지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광은 정신문화의 보고입니다. 이제 그런 문화의 소산들이 서로 모이고 협력하고 가치를 스스로 존중하여 자긍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영광 우도 농악 역시 정통한 영광인의 것이 되어야겠습니다.

문화 이기주의와 문화 독점의 어두운 시대를 벗어나야겠습니다.

진정한 예인이 대우를 받고 활동해야 겠습니다.

전 시대의 예능을 부단한 연마로 계승하고 우리 시대에 맞는 창의적 굿판을 만들어 갈 때 연암 박지원이 말했던 법고이지변 창신이능전’ -옛것을 본받으면서 변할 줄 알아야 하고 새것을 만들면서도 법도에 맞아야 한다. 라는 말씀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영광 우도농악 상쇠 최용께서는 그런 일을 해왔고 해야 할 사람입니다.

협률사와 같은 풍물판을 영광에서 실현시키고 진정한 예술의 혼을 이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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