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영기/ 난원영광노인복지센터장

마이크로소프트(MS) 공동 창업자인 빌 게이츠와 부인 멀린다 게이츠 부부가 2년 연속 미국 기부왕에 등극했다. 지난해에만 우리 돈으로 무려 약 28100억 원을 기부했고, 2013년까지 낸 기부금 총액도 32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32조원은 얼마나 큰 돈 일까? 한 예능프로그램에서는 1조원을 단군 이래 매일 60만원씩을 쓰고도 원금은 그대로 남는다는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설명하였다. 그 큰 기부금을 냈다니 돈 잘 쓰는 법에도 통달한 빌게이츠 부부는 박수 받아 마땅한 위인들이다. 일찍이 미국 기부문화의 시초를 마련한 철강왕 카네기는 부자인 채 죽는 것이 가장 부끄러운 일이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기부에 있어서도 왕이었다. 미국을 선진국으로 부르는 이유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그에 걸 맞는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정의다. “자신이 누리는 만큼 의무 또한 다하라!”노블레스 오블리주’. 이 말의 탄생지인 프랑스를 비롯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높은 정신문화를 자랑하는 국가에서는 어김없이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살아 꿈틀거렸다.

로마에서는 병역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아예 고위공직자가 될 수 없었고, 전쟁이 나면 귀족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알았다. 영국수상을 20명이나 배출한 오랜 전통의 최고 명문학교 이튼스쿨의 학생들은 전쟁이 발발하면 제일 먼저 싸움터로 달려갔는데, 2차 세계대전 때는 한 학급 전원이 참전하여 모두가 전사할 정도였다. 가히 대영제국의 후예답다. 유명 정치가문인 케네디가의 아들 네 명 모두도 군 입대를 했다.

러일전쟁 때 일본군의 노기 마레스께대장은 여순항의 203고지 전투에서 136일간이나 육탄공격을 감행한 끝에, 마침내 승리했지만 두 아들과 부하 3만 명을 잃어야 했다. 노기 장군이 귀국하는 날, 남편과 아들을 잃은 분노한 일본인들은 저마다 손에 돌을 쥐고 항구로 몰려갔다. 그러나 고개를 푹 숙인 채 두 아들의 관을 들고 함선을 내려오는 노기장군을 보며 그만 모두 눈물을 터트렸다고 한다. 핀란드를 비롯한 여러 국가는 아예 노블레스 오블리주정신을 법제화하여, 똑같은 죄라도 사회경제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에겐 처벌 수위를 높인다고 한다. 역시 선진국답다.

우리나라에도 노블레즈 오블리주사례는 많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 아래 흉년이 들면 어김없이 곳간의 문을 열던 경주 최 부잣집. 불우한 환경과 기생 신분이라는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모은 큰 제물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던 거상 김만덕. 그리고 절로 옷깃을 여미게 하는 우당 이회영 가문. 8대를 이어 정승과 판서를 배출한 삼한갑족의 이 명문집안은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엄청난 재산을 처분한 뒤, 59명의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가서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이회영의 6형제 모두는 독립운동에 온 몸을 바쳤는데, 유일한 생존자는 해방 후 초대 부통령을 지낸 동생 이시영뿐이었다. 가히 대한민국 최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할만하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입에 담기에는 민망한 구석도 많다. 1592430. 왜군들이 파죽지세로 북진해 오자 기겁을 한,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갔다. 강토와 백성을 지켜야할 국왕의 책무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로부터 358년 뒤 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대통령 이승만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이틀 만에 국민들을 내 팽겨 친 채 한강철교를 끊고 홀로 도주하였다. 게다가 국민들에게는 자신이 서울에 남아있는 것처럼 위장하는 방송을 틀어놓고 말이다. 정보를 입수한 고위층들은 제각기 가족과 함께 앞 다퉈 서울을 탈출했고 대통령의 말을 믿고 서울에 남은 시민들은 전쟁 참화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이 쯤 되면 승객들에게 그 어떤 구호조치나 대피명령도 없이 제일 먼저 세월호에서 빠져나온 선장과 선원을 탓하기도 착잡할 따름이다.

받는 만큼 주는 게 세상이치인데, 왜 우리 사회의 노블레스’(귀족)들은 오블리주’(의무)를 못하는 걸까? 1980년 이후 한국국적을 포기한 재벌가 남성 35명 가운데 23명이 외국 국적을 이유로 병역을 면제받은 사회. MB시절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위원 8명 중 대통령을 포함한 3인이 군대에 가지 않은 나라. 단물은 다 빨아먹으면서 기부에는 인색한 대기업들. 절로 한숨이 나온다.

국가와 사회를 지탱하는 근원적인 힘인 노블레스 오블리주’. 욕심을 버리고 베푸는 삶을 살았기에 후대에 이름을 남긴 경주 최 부자와 거상 김만덕. 그리고 편안한 삶을 박차고 독립운동을 위해 타국살이와 목숨마저 기꺼이 바친 이시형 가문. 그들이 그리운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 또한 모든 사람은 고귀하다. 때문에 지금부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남의 일로 밀쳐놓지 말고 우리의 몫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자신이 누리는 것만큼 주어진 의무에 충실하면 된다. 도대체 이 쉬운 일을 왜 못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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