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근/ 언론인

과거 영광은 문화 수준이 대단히 높았다. 현재는 문화 불모지나 다름없다. 문인들의 생가에서 영광 문화의 황폐한 현주소를 보았다

영광을 남도문학 1번지로 만든 문인들의 생가를 둘러봤다. 작정하고도 숱한 세월 그냥 보냈다. 부끄럽다. 교장 선생님으로 퇴직 후 고향이 좋아 고향에서 그냥 산다는 박 용국 선배를 길잡이로 모셨다. 먼저 조 운 선생 생가를 찾았다. 옛날 같으면 눈 감고도 찾을 수 있던 길이다. 새로 난 도로와 아파트 덕분(?)에 우리의 내비게이션은 오작동을 거듭했다. 선생의 생가는 20년쯤 전 장 진기 시인이 사들여 관리중이다.

펴이어도 펴이여도 다 못 펴고/ 남은 날은 고국이 그리워서냐/ 노상 맘은 감기이고/ 반드시 펴인 잎은/ 갈갈이 이내 찢어만지고선생의 시 파초가 새겨진 시비가 대문을 지키고 있다. 대문에 묶어둔 흰 전선을 풀고 들어섰다. 집은 잘 보존돼 있다. 조 의현·조 응환·이 기태·조 영직 등의 시비 10여개가 100살이 넘은 나무들과 함께 집을 지키고 있다. 잘려 나간 석류나무의 흔적이 아프다.

5분 정도의 거리, 읍내 사거리에서 향교 가는 길목의 조 남령 시인 생가. 가람 이 병기가 극찬한 시인이다. 우연히 만난 서예가 조 경길 선배와 함께 들어섰다. 거미줄과 허물어진 집. 우리 민족, 이 나라의 굴곡진 역사를 만난 듯하다. 이웃에 살면서 그 집 딸기 밭에서 딸기 서리를 했다는 선배에게서 시인의 가족사를 들었다. 학식과 덕망을 갖춘 부친, 이웃의 어려움을 두루 살폈다는 모친, 6남매 모두가 범상치 않은 인물들로 기억했다. 역사가 빚은 가문의 비극을 접하면서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사거리에서 법성 쪽으로 조금만 가면 시조 시인 조 의현 선생의 집이다. 제헌 국회의원을 한 조영규(4)의 숙부다. 집도 샛문으로 연결돼 있다. 제법 큰 한옥인데 다 쓰러져 간다. 생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술 잘 드시는 할아버지로만 기억 했다. 죄송하다. 이제 현대 시조 시인으로 문학사에 빛나는 영광의 선현으로 모시기로 다짐했다.

같은 길목, 지척에 있는 광주·전남 최초의 동화 작가 정 태병 선생 생가 터. 지어진 지 오래지 않은 집이 들어서 있다. 아무도 살지 않아 낡은 대문이 덜렁거린다. 영광군의 문화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방향을 틀어 터미널에서 기독 병원 가는 길목에 소청 조 희관 선생 생가가 있다. 10여 년 전 조 운 선생 시비 건립 추진에 적극 나섰던 나 두종 씨 소유가 된지 오래다. 동생 병철 군이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다. 유독 나무가 많다. 집 앞에 선생의 생가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영광에서 살아온 사람들도 대부분 은행여관으로만 알고 있다. 목포 사람들은 선생을 목포 문학 발전에 공이 큰 인물로 모신다. 영광의 부끄러운 단면이다.

한나절 동안 바삐 움직이던 발길을 멈췄다. 대신 머리가 바빠졌다. ·소설·평론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중앙 무대에서도 인정받았던 정태연 선생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더 이상 영광에 문학의 찬란한 꽃을 피웠던 분들의 흔적을 알지 못한다. 이제부터 찾아야 한다. 영광 문학의 부흥을 위한 길을 찾아야 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그 멀고 어려운 길을 가는 중심을 마련해야 한다. 문학관 건립이다.

이웃 고창군에 비해 문화 수준이 현저하게 낮다고 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영광에 발령 받아 사는 사람들에게서 문화가 없는 지역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사람도 많다. 조 운 생가의 석류나무를 베어버리는 군정이었다. 군민의 행복을 약속하는 군정이 새롭게 시작됐다. 문학관 건립을 약속했다. 60년 저쪽에 피웠던 찬란한 문화의 꽃을 다시 피워 내는 첫걸음이다. “오직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으로, 그것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까지 행복을 준다.” 김 구 선생의 말을 새기며 사는 영광이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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