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원/ 여민동락공동체 대표 살림꾼

을 꿀 수 없는 절망의 시대

또 한 해가 저문다. 그러나 여전히 시대는 파탄이다. 혹자는 정직한 절망이야말로 희망의 시작이라 했다. 허나 하루를 버텨내기 힘든 평민들 처지에선 고약하고 비루한 일상을 넘어설 희망이 당최 보이질 않는다. 노동자 농민의 실정은 오래전부터 파국상태였거니와, 간판을 내릴 채비를 하는 자영업 시민들도 한 둘이 아니다. 어찌할 것인가. 저 무도한 권력의 농단과 모조리 다 차지하고자 하는 사악한 자본들의 카르텔을. 멘토를 자처한 이들은 누구나 꿈을 가지라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곤궁하기 짝이 없다. 정작 누군가에게 꿈을 묻기가 어려워진 아픈 시대인 탓이다. 어쩌면 꿈 자체가 사치가 됐다. 꿈을 꾸고, 꿈을 키우고, 꿈을 현실로 만들어 낼 시스템의 붕괴, 이게 바로 우리사회가 처한 최악의 참상이다. 시장임금체계와 고용의 불안으로 젊은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재능과 개성을 등지고 한 번도 꿈꿔오지 않은 공무원 시험에 몰두한다. 맞벌이로 가정을 꾸려가는 대부분의 평민들은 태아보험부터 상조보험까지 스스로 안전망을 만들어가며 허덕이고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회임금을 통해 복지국가를 만들어 줄 태세이던 정치권의 수선과 요란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절망의 주범은 바로 정치의 실종

그 참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정점에 정치가 있다. 한마디로 정치다운 정치가 없다는 얘기다. ‘문고리 3인방과 같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촌극만이 정치의 중심에 서 있다. 무슨 생각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지 모를, 그래서 추락한 지지율로 집권의 절반을 겨우 지탱해가는 갈팡질팡 대통령은 그렇다 치자. 야당다운 야당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권력과 자본의 반대편에서 신음하는 약자들을 위해 투신하여 집요하고 겸손하게 희망을 선포하고 집권을 설계하는 야당은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1야당은 정권을 잃은 후 내내, 그들만의 링에서 그들끼리 치고받으며 헤매고 있다.

당대표 선거과정 하나만 봐도 오로지 국민들은 오래된 드라마를 지루하게 지켜봐야 할 뿐, 쇄신과 혁신의 징표를 찾기 어렵다. 결국 집권세력을 봐도, 야당을 봐도 모두 다 공황상태다. 한 때의 희망이었던 진보정당도 자발적 갈라섬을 선택했고, 심지어 한 정당은 종북몰이의 희생자가 되어 정치적 테러를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히 정치적 절망의 종결판이라 할 만 하다. 더 가관인 것은 민생과 복지의 용광로여야 할 자치의 최전선,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다.

청와대와 여의도 정치의 파산과 실종을 틈타 선거와 민주주의라는 합법적 대의체계를 악용해 공공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토호와 정치자영업자들이 여기저기 기생충처럼 파고들고 말았다.

국민을 배제시키는 지배시스템

그래서일까. 국민들은 정치란 으레 그런 것이라 자조하거나 인정하며 잘못된 학습세례의 피해자가 되어가고 있다. 이 땅의 지배세력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능멸하면서도 계속 지배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정치인만의 정치로 정치를 기득권에 가두고, 끊임없이 주인인 국민을 정치적 배회자로 격리시키는 정치놀음으로 정치를 실종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주인인 국민은 선거 때만 되면 자신의 계급계층적 이해와 신분과 처지의 염원과는 다른 선택을 해 가며 파산한 정치의 꼭두각시가 돼 가고 있다. 제주 강정과 경남 밀양의 분노도, 세월호의 참극도, 군대에서의 억울한 죽음들도, 끊임없이 당하고 사는 노동자들의 절규도, 삶의 근원을 팔아넘기는 쌀시장 개방과 농민수탈도, 선거 때만 되면 다 남 일처럼 잊어버리게 만든다. 국민들이 지닌 변화와 진보에 대한 감수성을 거세시키고, 끝모를 절망만을 재생산해내는 악마의 지배시스템을 구축해 버렸다는 얘기다.

희망은 바닥에서, 그리고 다시 운동으로

저 절망의 정치시스템을 깨야 시대의 새벽이 온다. 시대의 새벽은 결국 다시 바닥의 국민들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이 시민이든 민중이든 국민들의 의식이 진보함으로써 담보되는 것이다. 기성정치의 꼭두각시로 전락해버린 국민 스스로의 학습과 성찰이 중요하다.

다시 치열하게 역사와 정치를 학습하고, 종편의 포로가 돼 가고 있는 민중들을 깨우는 정치학교를 열고, 공공성을 중심으로 민주공화국의 제대로 된 정치를 만들어 갈 선수들을 키우는 일을 곳곳에서 조직해야 한다. 합법정부의 옷을 입었으나 독재시대의 야만보다도 더 집요한 능멸을 해대는 국가와 지배계급에 맞설 대체재를 키워야 한다는 얘기다.

그것이 새로운 정당이든 아님 새로운 정치운동이든. 다시 같은 뜻을 가지고 같은 이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 오래전부터 그리고 이미 지금 상황은 녹록지 않다. 그러나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는 말도 있질 않는가. 그래서다.

2015년 벽두는 새로운 시대의 새벽을 준비할 설계와 결기로 시작하자. 욕설과 탄식으로 정치를 뒷담화로 방치하며, 이대로 하염없이 당하고만 살 수는 없질 않겠는가.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