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원/ 여민동락 대표 살림꾼

칼럼을 쓸 때마다 마감에 쫓긴다. 이번에도 밤을 샜다. 두 개의 주제를 놓고 궁리를 거듭했다. 하나는 해방 70주년, 우리 민족의 미래였고, 다른 하나는 여의도 정치의 실종과 새로운 대안이었다. 둘 다 주제가 묵직한 터라 며칠 째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지쳐서 새벽에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잠시 눈을 붙였을까, 누군가 무릎 안마를 하는 게 느껴졌다. 처음엔 이제 겨우 여섯 살 된 아들이 일어나 아빠 무릎을 장난감 삼아 노는가 싶었다. 이불을 걷고 살짝 살피니, 아뿔사 어머님이셨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두 손으로 정성을 담아 아들 무릎을 주무르고 계셨다. 이십 년 가까이 어머님을 모시는 형님댁이 여행을 떠나면서 잠시 막내아들 집에 오신 어머니다. 새벽까지 잠 못 이루며 방문 너머 거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아들을 보며, 어머니도 함께 잠을 못 이루셨나 보다. 모른 척하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머님 손힘이 너무 약한 게 아닌가.

울컥 눈물이 났다. 그렇게 이불 속에서 한참을 속울음했다. 어머님 표현대로라면 젊었을 적 그리도 짱짱했던 분이다. 어머님은 올 해로 구순(九旬)이 되신다. 식민지 시절에 태어나 생애 내내 혹독한 가난과 고난을 다 겪으신 분이다. 몇 년 전 대퇴부 골절로, 이제는 지팡이에 의존해 사신다. 옷 갈아입는 일조차 벅차시다. 화장실조차 겨우 벽을 집고서야 왕래하실 만큼 노쇠하셨다. 마을에선 이미 최고령 어르신이다. 팔남매를 키우셨고, 손주만 해도 열여덟 명인 대가정을 일구셨다. 초등학교 근처에도 못가본 분이라 오십대 중반에서야 겨우 글을 터득하셨을 정도다.

그조차 내가 가르쳤다. 열 살 쯤 된 나는, 그때만 해도 한글도 제대로 모르는 어머니가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때부터 내게 어머니는 일명 복지대상자였고, 나는 한글반 선생님이었다. 스무 살쯤 됐을 때다. 도시로 떠나 어머님을 자주 뵐 수 없던 나는, 모처럼 잠자리에 들어 불을 끈 채 어머님 손을 잡고 추억담을 나눈 적이 있다.

어무이...근디 왜 나 초등학교 때 매번 첫 방아만 찧으믄 광목천 쌀 차두(자루) 네 개를 여기 저기 갖다 놓으라고 했다요?” “그 집들이 우리동네에서 가장 가난했던 집들이어서 그랬제야. 자기 땅 한 평 없이 남의 땅 붙여먹고 사는 사람들도 많았어야.” “그런디 우리집도 힘든디 왜 어무이가 그 집들을 챙겼다요?” “뭐시냐.. 교회만 가믄 이우제(이웃)를 돕고 살라고 헌디, 우리도 힘든께 그게 말처럼 된다냐.

 그래서 첫 방아 찧으믄 그때 딱 나눴제. 그때를 놓치믄 일 년 내내 못하고만께” “근디 왜 그걸 나한테 한밤중에 가져다 주라고 했다요? 컴컴헌디.”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자존심이 쎈 법이어야. 그거 쪼까 줌서 생색내고 주믄 쓰겄냐?” 그 말씀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불을 켜고 정색하고 앉아 어머니를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여쭸다. “어무이 근디 왜 형들 안 시키고 어린 나를 시켰다요?” “니그 성들은 머리가 굵어서 어따가 말하고 다닐까봐 그랬제야.” 하신다.

! 그때서야 알았다. 학교교육이라곤 도무지 받아본 적도 없고, 초등학교 다니는 막내아들에게 한글을 겨우 깨쳤던 분이라곤 믿겨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다시 보였다. 철학자의 모습이었다. 결국 삶이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가난과 고난이, 그리고 흙과 함께 한 농부의 근성이 어머니를 철학자로 만드셨다. 지성이란 다른 게 아니다. 더불어 함께 사는 관계능력과 나보다 더 가난한 약자를 위해 눈물 흘릴 줄 아는 나눔과 배려능력이 바로 지성의 전부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내게 세상의 전부였다.

지금 복지현장에 있는 내 원초적 스승이 바로 어머니인 셈이다. 지금 어머니는 글을 읽고 쓰는데 무리가 없다. 휴대전화도 자유대로 활용하신다. 내 휴대전화 속 어머니 이름은 바로 세상의 전부. 노인복지를 하면서, 어르신이 단순히 급여와 서비스만을 받는 복지대상자가 아니라 철학을 나누는 복지의 주체라 여기게 된 것도 어머니 덕분이다. ‘마을에서 어르신 한 분을 잃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표어를 신념으로 갖게 된 것도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서다.

삶이란 게 그렇다. 부모보다는 자식이 앞선다. 내 삶도 그렇다. 어머니보다는 처자식이 먼저가 돼 버렸다. 이제는 아들 삶의 복판에서 밀려 변방에 자리해버린 어머니! 그래도 어머니는 내게 여전히 거목이다. 위대하다. 학력과 재산, 지위와 명예와도 관계없다. 쌀 자루 네 개의 나눔만으로도 어머니는 영원히 내 삶의 우상이다. 자식에게 존경과 존엄의 상징인 부모가 얼마나 있을까. 나는 내 아이들에게 존경과 존엄의 상징이 될 수 있을까. 칼럼 주제를 바꿀 만큼, 오늘 어머니의 존재는 내 삶의 우주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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