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균 / 행정학박사, 초대 헌법재판관, 광주한가람 이사장

1960년대의 궁핍(窮乏)

우리나라는 단군성조의 개국 이래 반만년 이어온 가난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경제적으로 세계의 선진국 대열에 당당히 진입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1945815일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되었으나 3년 동안의 미군정기간이 있었고 그 기간 일제의 관료들이 미군정을 보좌하였다.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수많은 정당 사회단체가 우후죽순처럼 난립하여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그 무렵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이 제정되었으나 반민특위가 1년도 못되 해산 되버려 악질 친일인사에 대한 문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리고 정부수립 후 2년도 못되어 19506 · 25사변이 있었고 1953년도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때 경상도를 제외한 남·북한 전국이 초토화되었고 수백만 명의 사상자와 고아가 생겨났다.

여순반란사건과 6 · 25사변직후 전라도 고산지역은 일부 좌익세력의 암약 무대가 되었고 그 때문에 낮에는 경찰, 밤에는 빨치산(공비)이 지배하는 지역이 많았다. 그때 민주주의 ·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고한 양민이 서로 해코지를 당하여 엄청나게 많은 희생자가 생겨났고 본의 아닌 부역자가 되기도 하였다. 부역한 장본인이라 할지라도 총칼 앞에 강요된 행위라면 처벌할 수 없음에도 정부는 그 일가친척에게까지 연좌제의 책임을 물어 공직채용이나 일상생활에 있어서 여러 가지 차별이나 불이익을 당하게도 하였는데 광주 · 전남(영광, 함평 등)이 대표적 피해지역이다.

일제 때 항일독립운동가 중에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자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6 · 25사변을 전후하여 공산당이 악의 축으로 매도되는 분위기에서 반공투사의 갑옷을 입은 친일인사들이 용공의 의심을 받고 있는 독립투사 위에 군림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도 생겨났다.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들을 제압하기 위한 방편으로 친일인사를 사면하고 중용하였기 때문이다.

발췌개헌, 45입개헌 등으로 장기집권을 획책했던 자유당 독재정부가 19604 · 19혁명으로 붕괴되고 민주당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신 · 구파의 정쟁 및 갈등과 (데모로 시작되어 데모로 끝나는 데모크라시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데모가 성행하여 국법질서가 확립되지 못하고 국가의 안보까지도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19615 · 16 군사정부가 수립된 후 3권을 통합한 유신정권까지 탄생되었으나 197910 · 26사건으로 종료되었다. 1980년에는 신군부에 저항한 5 · 18 광주민중항쟁으로 많은 희생자가 있었고 국내외의 여러 저명인사들이 망월동 국립묘지를 참배하여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있으나 아직도 그 깊은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다.

5 · 16 당시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은 82불에 불과하여 세계의 최빈국 수준이었다. ‘열두 가지 설움 중에서 배고픈 설움이 제일 크다’ ‘배고플 때는 침만 삼켜도 낫다’ ‘보릿고개 손님은 호랑이보다 무섭다’ ’칠궁이 춘궁보다 무섭다는 속담이 그대로 피부에 와 닿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보릿고개에는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였으며 전국 의 검사들은 항시 행려아사자에 대한 변사체처리지휘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높아진 위상과 소외 계층

우리나라는 2014년도에 1인당 국민소득 28,739불을 이룩하였고 박근혜 정부는 4만불을 목표로 세계 10대 경제강국을 지향하고 있다. 201412월말 외환보유액은 3,636억불이고 그 규모는 중국 일본 스위스 대만 러시아 브라질에 이어 세계 7위이다. 우리나라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나라는 칠레 아세안 EU 미국 호주 중국 등 14개국이고 교역량은 2011년도에 이미 1조불을 초과하여 세계 7위이다.

그리고 올림픽 · 월드컵 · 유니버시아드 · 아시안게임 모두를 유치(하고 개최)하는데 성공하였다. UN사무총장이 한국인이고 세계은행 총재가 재미교포(金 墉)이며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풍미하고 있다. 광주는 금년에 아시아문화전당이 개관되고 서울까지 1시간 30분이면 주파할 수 있는 KTX가 개통된다. 그리고 광주비엔날레는 세계 5위로 평가될 정도로 성장하였고 약 140일 후에는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가 개최된다. 남북 단일팀의 구성 및 백두산으로부터 육로를 통한 성화봉송의 성사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되어 있는데 만일 성사된다면 광주는 민주 인권 평화의 도시로 크게 부상비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발전을 예견이나 한 듯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광주학생독립의거가 일어난 해인 192942일 동아일보에 동방의 등불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을 예찬하는 시를 남겼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동쪽의 한 나라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이하 생략>

 

 

국제적으로 공인된 새마을운동(근면 자조 협동)

그러나 위와 같은 경제성장이 빛이라면 그 이면에는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사건으로 억울하게 궁핍한 생활을 한 짙은 그림자 층이 있고 아직도 우리사회에는 상대적 빈곤층이 상당히 팽배해 있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 점 우리 모두가 더불어 사는 마음 자세로 치유하고 전향적으로 해결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숙제인 것이다.

우리나라가 6·25의 폐허에서 불과 60여년 만에 그것도 북한당국의 핵무기 개발 등 끊임없는 해코지와 남침 위협 속에 엄청난 안보비용을 부담해가면서 세계인이 한강의 기적이라고 극찬할 정도로 괄목상대할 만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새마을운동 내지 새마을정신이 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일부 새마을지도자의 자화자찬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고 국제적으로 그렇게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에서는 대통령(미얀마, 말라위, 우간다) 부통령(리베리아) 국무총리(케냐 등) 등이 우리나라를 직접 방문하여 새마을운동을 전수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UN에서는 개발도상국 원조 핵심사업(ODA)으로 새마을운동을 채택하고 있으며 13개국 32개 마을이 시범마을로 지정되어 새마을운동을 시행하고 있는 중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새마을운동 관련 기록물(22,084)은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고 새마을운동의 성공요인에 대하여 한국정부와 OECD가 공동으로 연구하고 있다. 외국인(132개국 56천명)에 대하여 새마을교육이 시행되고 있고 몽골 · 네팔 · 콩고 · 우간다 · 키르키즈스탄에는 새마을회가 조직되어 있다. 그런데 새마을운동에 대한 국제적인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발상지인 우리나라에서는 그 열기가 시들해져 버렸고 새마을지도자들도 자긍심을 잃고 있는 실정이다.

새마을운동은 민족중흥 · 조국근대화의 신앙을 가진 박정희대통령이 1970422일 전국시도지사회의석상에서 한해대책을 논의하면서 농민의 자립, 자조정신을 바탕으로 마을가꾸기 사업을 시행할 것을 관계 장관에게 지시하고 이것을 새마을가꾸기운동이라고 명명한데서 비롯되었다.

그때 좁고 구불구불한 마을길이 넓게 직선으로 뚫리고 농로가 확장 · 포장되었으며 지붕도 개량되어 농촌이 몰라보게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정부는 그 운동을 마을주민 스스로 상호협력하여 시행하도록 지도하였던 것이다. 1971년도에 전국 33267개의 행정리동에 시멘트 335포대씩을 무상으로 배포하여 마을주민 스스로 숙원사업을 시행하도록 하였고, 그중 시행 결과가 우수한 16,600개의 부락에 대하여 추가로 시멘트 500포대와 철근 1톤씩을 무상 지원함으로써 마을주민의 자발적인 협동 노력봉사를 유도하고 장려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농촌 근대화운동이 자리 잡아가면서 공장 도시 직장 등을 대상으로 하는 새마을 운동으로 영역이 넓혀지고 나아가 외형적인 성과에 머물지 않고 정신계몽으로까지 확대 발전되었던 것이다. 새마을운동의 지도이념은 근면 자조 협동이며 그 것은 우리민족이 영구히 존중하고 준수해야 할 덕목이라고 사료된다.

우리나라가 반만년이나 가난을 대물림해 오고 근세에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까지 받게 된 것은 우리민족이 일찍이 서세동점의 물결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쇄국주의 정책으로 일관하여 반상의 차별로 일반국민이 계몽각성할 기회를 놓쳐 버렸을 뿐만 아니라 국민이 진취적 기상을 갖지 못하고 태만했던데 기인하는 것이다.

일제 때인 192089일부터 동월 23일까지 동아일보에 보도된 조선인의 단처를 논하여 반성을 촉하노라는 제목의 사설에서는 우리민족의 단점을 6가지로 요약하고 있는데 웅장한 기풍이 무함, 지속성이 무함, 신앙심이 부족함, 태타의 폐가 유함, 당파열이 심함, 배관열이 심함 등이 그것이며 대부분 오늘날에도 우리가 유념하고 개혁해야 할 내용들이다.

 

 

김 준 선생의 발자취

1972년도 새마을연수원이 개원된 이래 전국에서 국회의원 장차관 법조인 교수 일반 공무원 기업인 상공인 및 농촌지도자 등이 새마을운동을 배우고 몸소 실천하게 되었고 훌륭한 새마을 지도자도 수많이 배출되었다.

위와 같은 새마을지도자를 길러낸 왕스승이 농업의 전문가이고 달인인 혜경(惠耕) 김 준(金準) 원장이며 그는 전남 영광 출신이다. 선생은 원래 기독교 신자였지만 천주교 신자(바오로)로 영면하였고 불교와 원불교에도 깊은 이해와 인연이 있다. 새마을지도자 중에는 가정을 돌보지 않고 새마을운동에만 몰두 ·전념한 의인이 적지 않은데 그 대표적 인물이 김준선생이다.

김준 선생은 1926425일 전남 영광군 군남면 포천리에서 출생하여 이리농림학교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교수도 역임한 농학전문가이다.

6· 5사변 직후에는 전쟁고아들과 동거하면서 직접 뒷바라지하기도 하였고 추월산 가마골에 농민학숙을 세우고 이상은 높게 현실은 착실하게 살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마음 밭을 가는 심경으로 산지개간을 통한 자급자족운동을 전개하기도하였다. 1962년도에 재건국민운동중앙교육원 교수 1966년 농협대학 교수로 일하다가, 1972년 새마을지도자연수원 초대 원장에 취임한 이래 1980년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 새마을중앙본부 회장을 거쳐 남도학숙 원장, 초당산업대학 총장, 귀일원 이사장 등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새마을운동 내지 새마을정신의 확산 · 정착에 헌신 진력하였다.

새마을연수원에서는 원생들이 지위의 고하에 관계없이 공동 숙식, 조조기상, 국기에 대한 경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애국가의 4절까지의 제창 새벽 구보와 새마을노래 그리고 학과의 수업 외에 새마을운동 성공사례 청취, 취침전의 분임토의 및 발표 등의 규칙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새마을연수원에 여러 저명한 교수들이 출강하였으나 그중에서도 김준선생의 농심철학은 명쾌하고 논리정연하여 수강생 모두가 크게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새마을운동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체계적 · 논리적으로 정리한 것이 김준선생의 농심철학이다. ‘이농심행 무불성사(以農心行 無不成事)’ 즉 농심으로 행하면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 없다는 것이 선생의 지론이다. 새마을연수원에서 선생은 농심이론으로 사회지도층의 애국애족 경리중의(輕利重義) 청렴정직 근검절약 호애공생(互愛共生) 등 충의심의 고취와 정신계몽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농심은 농사짓는 마음또는 농부의 마음이라고 소박하게 이해할 수도 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던가 농위국본이라는 말이 있지만 옛날에는 농민이 절대 다수였고 농사가 생계 및 생활의 기본 수단이었던 것이다. 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에는 김을 매며 가을에 추수해야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농심은 1차산업인 농사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고 정보산업 서비스산업에서도 존중될 수 있는 여러 가지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농업이나 농민의 개념은 어업 축산 임업 등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다소 넓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