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근/ 언론인

메르스로 인해 나라의 현주소를 알게 됐다. 정부의 대응은 눈물 빼는 개그콘서트다. 서민대중의 삶을 아는 사람들이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

80년대 말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까다로운 입국 수속을 거쳐야 했다. 옆 줄 사람들은 여권만 펼쳐 들고 미끄러지듯 빠져 나갔다. 그 줄에 일본인이 끼여 있었다. 국격(國格)의 차이를 실감했다. 처음으로 일본이 부러웠다. 이제 우리도 세계 100여개 나라를 비자 없이 입국할 수 있다. 자기 나라에 이익을 주는, 부자 나라 사람으로 대접 받고 있다. 쥐뿔도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부자들 덕분에 국제사회에서 대접(?)받는다. 선진국 국민이라는 착각도 했다.

착각은 깨지기 마련.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덕분에 착각에서 깨어났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응은 우리가 얕보는 어느 나라보다 후진적이었다. 정부로부터 얻은 첫 정보는 낙타 고기와 낙타유를 먹지 말라였다.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들을 먹지 말란다. 삶은 돼지 머리가 웃다가 꾸러미 꿰질 소리다. 전파의 진원지가 된 병원 명단은 가관이다. 병원 소재지가 엉뚱하다. 전북 순창은 졸지에 시로 승격했다.

정부의 대응은 국민을 공포에 몰아넣기 딱 좋았다. 괴담이 퍼지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세계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삼성서울병원이 진원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아니, 믿고 싶지 않다. 삼성 병원은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는 표상이기도 했다. 단군의 자손, 반만년 역사, 한글과 더불어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게 하는 요소였다면 과장일까. 하여간 선진국착각은 깨졌다.

메르스로 인해 고통 받고 사망한 분들에겐 유감이지만 긍정적 효과도 있다. 경각심을 일깨웠다. 나라의 곳곳에 후진적 행태들이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현실을 보게 했다.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첫째, 세월호 참사를 겪고도 재난에 대비한 시스템은 마련되지 않았다. 둘째,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당국자 누구도 국민의 생명 보호를 의무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셋째, 정부는 무능한데다 일 조차 하지 않는다.

누차 말하지만 불이 나야 새 집을 짓는다. 대한민국에 불이 났다. 지난해에는 세월호, 올해는 메르스다. 우리 기술, 특히 IT 분야는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 하루에 차 몇 대 다니지 않는 골목길의 과속 방지턱 까지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이 자랑스러울 정도다. 이런 기술력을 갖고서도 감염자가 휘젓고 다니도록 만들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자가 격리. 전염 위험자를 집에 있게 한 것은 가족에게는 옮겨도 된다는 말인가. 낙타 고기 먹지 말라는 경고만큼이나 황당하다. 개그 콘서트다. 웃음 대신 눈물을 쏙 빼는.

중국판 세월호 사건인 양자강 선박 침몰 사건 현장에는 리커창 총리가 있었다. 메르스 경보 이후 박근혜 대통령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국회법 개정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메르스에 대해서는 열흘이 넘어 퍼질 만큼 퍼진 뒤에야 전문가에게 병원 폐쇄권을 주겠다고 했다. 전형적인 뒷북 행정이다. 덕분에 국제적 망신을 샀다. 여행 자제국으로 전락했다. 국격의 추락이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인의 값이 추락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늠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다. 경제력에 정신적·사상적 풍요 정도다. 개인과 사회가 상호 보완하며 원만하게 돌아가는 시스템의 유무가 가장 중요하다. 갈등과 냉소, 정쟁과 시스템 부재로 난파선처럼 흔들리는 한국은 분명 선진국과 거리가 멀다. 단지 경제적 성장으로 국제사회의 대접을 조금 받고 있는 정도다. 특히 정치와 공직 사회의 의식 수준은 후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인사청문회 대상자는 군대 못갈 사람이 대부분이다. 재산도 형성 과정이 불투명하다. 마치 출세한 사람들만의 사회가 따로 있는 듯하다. 서민 대중의 삶을 아는 사람들이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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