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돈(8) - 연암 박지원

영광백수 출신/ 광주교육대학교 교수/ 철학박사

조선 영조, 정조 때의 실학자였던 박지원(1735-1805)은 벼슬을 하지 못했던 아버지를 두었고, 그나마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할아버지 손에서 자라다가 열여섯 살에 그 할아버지마저 죽자 결혼을 하였다. 남겨진 유산조차 없었기 때문에 떠돌이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그 와중에도 천문, 지리 등 서양의 자연과학을 주의 깊게 연구하여 스무 살에 이르러서는 사회개혁의 선구자이자 저명한 문학가로 제법 이름을 날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지원은 중년 때까지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가족을 경기도 광주로 이사 보내고, 혼자 탑골(서울 종로 근처) 뒷골목의 오두막집에 남겨진 그는 홍대용, 이덕무 등과 함께 주자학을 비판하고 청나라의 과학과 문물을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끼니때가 되어 쌀이 있으면 밥을 지어 격식 없이 함께 먹고, 없으면 그만이었다. 혹시 막걸리라도 있을라치면 더욱 흥을 내는, 그런 세월을 보냈다.

그 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홍국영이 세도를 부리기 시작했고, 홍국영은 박지원과 그 일파가 세상을 깔보고 자기네들을 무시한다고 하면서 벽파(사도세자를 무고하여 비방한 당파)로 몰아붙였다. 이에 박지원은 황해도 금천 땅에 있는 첩첩산골 연암 골짜기로 들어갔다. 그는 이곳에 과실나무를 심고, 양어장을 만들고, 벌집도 차려보았다. 그러나 연암에서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초가삼간을 짓고 손이 부르트고 발바닥이 갈라지도록 일을 해보았으나, 겨우 돌밭 몇 뙈기를 일구었을 뿐이다. 어릴 적에 부모를 잃고 형수 손에서 자란 박지원은 혼자되어 병까지 얻은 형수를 호강시켜보려 했다. 그러나 그 형수는 이 골짜기에 와서 호강 한 번 못해보고, 죽어 뒷산에 묻혔다.

그의 탁월한 저서 <열하일기> 속에는 풍자적인 내용의 단편소설들이 들어있다. <호질문>군자를 가장한 선비가 호랑이에게 꾸지람을 당한다.’는 줄거리로서, 당시의 부패하고 위선적인 유생들의 가면을 폭로한 작품이다. <허생전>에서는 허 생이라는 가상인물이 등장한다. 남산골에서 공부하고 있던 허 생은 가난을 못 이겨, 장안의 갑부인 변씨를 찾아간다. 그에게서 1만 냥을 빌려 지방으로 내려간 허 생은 이 돈을 밑천으로 삼아 장사를 벌였고, 여기에서 크게 돈을 벌어 좋은 일을 많이 한다. 그런 다음, 10만 냥을 변씨에게 갚는다. 놀란 변씨가 그의 뒤를 밟아 보니, 남산 밑의 작은 오두막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 후로 두 사람은 깊이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하루는 변씨가 한 정승을 허 생에게 소개한다. 하지만 정승은 허 생으로부터 비웃음만 사고 돌아가는데, 허 생의 비범한 인품을 알아차린 이 정승이 그를 기용하고자 다시 찾아갔지만, 이미 허 생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는 줄거리이다.

이 책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가난은 박지원에게서 결코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글이나 읽었던 선비가, 그것도 뚱뚱한 몸으로 농사를 짓기에는 너무나 조건이 맞지 않았다. 비록 그 자신이 생산하지 않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외쳤지만, 이때에서야 비로소 선비는 선비로서의 할 일이 따로 있음을 깨달았다. 이리하여 그는 쉰 살의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주 하찮은 벼슬을 받았다. 이어 현감, 부사 같은 원님 노릇도 하게 되어 가난을 조금 벗어났다. 한편, 그의 비루하고 속된 말, 저속한 표현 그리고 현실에 대한 신랄한 풍자에 대해 선비들은 역겨워하였고, 글을 읽어본 정조 역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박지원은 이에 굴하지 않고, <마장전>, <양반전> 등의 작품을 통하여 봉건적 양반 유학자들의 위선과 가식을 폭로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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