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권력(5)-정도전(1)

영광백수 출신/ 광주교육대학교 교수/ 철학박사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를 여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 사람, 삼봉(三峰) 정도전(13421398,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유학자)은 향리(鄕吏-한 고을에 대물림으로 내려오던 구실아치)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는 경상북도 영주에서 살았다. 그 후, 개경에 올라와 목은(牧隱) 이색(이성계 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던 고려 말의 충신)의 문하에서 정몽주, 이숭인 등과 함께 유학을 배웠다. 과거에 합격한 그는 성균관박사와 태상박사(나라의 제사를 관장하던 정6품 관직)를 거쳐 예의정랑(5품 관직)이 되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이인임(공민왕 사후 우왕을 추대하여 정권을 잡음. 충복들을 요직에 앉히는가 하면, 매관매직 등 전횡을 일삼았음. 그 횡포에 분노한 최영, 이성계 등에 의해 죽임을 당함) 등의 친원(親元) 정책에 반대하여, 전라도 나주로 귀양살이를 떠나게 된다. 여러 해 동안 이어진 유랑 기간에 그는 초가집에 살면서, 이웃에게 음식을 빌어먹기도 하고, 스스로 밭갈이도 했다.

1383,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간 정도전은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3품 당상관의 벼슬)이 되었다. 이듬해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자, 우왕(고려 32대 왕)을 폐하고 창왕(우왕의 아들)을 세워 밀직부사(왕명의 출납 등을 맡아보던 종2품 벼슬)가 되었다. 이후부터는 스승인 이색과 친구인 정몽주와 의견이 서로 달라 멀리하게 되었다.

이성계, 조준 등과 협의하여 우왕과 창왕 부자를 폐위시키고, 공양왕(고려의 마지막 왕)을 즉위시킨 공으로 정도전은 높은 벼슬과 함께 공신전 100(30만평 이상의 밭)과 노비 10명을 하사받았다. 명나라에 가서는 이성계가 명을 치려 한다.’는 모함을 해명하고 돌아와, 도평의사사(최고 정무 결정기구) 겸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391년 삼군도총제부가 설치되자 우군총제사가 되어 이성계, 조준(좌군총제사)과 함께 병권을 장악했다. 이어 개혁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불교배척의 기치를 높이 들었고, 이색과 우현보 등에 대한 처형을 상소했다. 입신출세를 위해 스승(이색)마저 배반한 것이다.

그에 대한 인과응보였을까? 정도전은 그해 9월 평양윤(평양시장)에 임명되었으나 반대세력들의 탄핵으로 경상도 봉화로 유배당하였고, 이어 나주로 옮겨졌으며 두 아들은 서인(庶人-벼슬이나 특권이 없는 일반사람)이 되었다.

이듬해 봄, 귀양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어린 시절의 고향 경북 영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 무렵 이성계가 해주(황해도)에서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부상을 입자,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몽주 등에 의해 탄핵을 받아 보주(고려와 금나라의 국경 요새)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곧 풀려나 개경으로 소환되어 충의군에 봉해졌다. 13924월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살해되고 반대세력이 제거되자, 7월 조준, 남은 등과 더불어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왕조를 개창하였다.

개국 직후에는 태조의 교지(敎旨)를 지어 새 왕조의 국정방향을 제시하였으며, 이어 개국공신 1등으로 여러 벼슬을 겸직하며 정권과 병권(兵權)을 장악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명나라에 가서 조선건국의 당위성을 알렸다. 13941월 병제(兵制) 개혁에 대한 상소를 올리고, 3월 경상, 전라, 양광 삼도도총제사(군의 업무를 총괄하는 최고직책)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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