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윤/ 서울 송파구 잠실본동

축제의 지역적 특성이나 내용상의 독창성 문제는 사실상 축제를 주도하는 주체가 누군가 하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말은 지역축제이며 하는 공간도 특정 지역에서 개최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지역적 내용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축제가 많다. 지역적 내용은커녕 지역주민 다수들이 참여할 여지조차 마련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지역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축제를 이끌어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에 기획된 이벤트일수록 이러한 경향이 높다. 행정기관이 전시행정의 일환으로 축제를 기획하는 까닭에 주민들의 문화적 역량을 수렴하여 효과적으로 발휘하게 하려는 노력보다 대도시의 상업적인 이벤트 전문가들을 불러다가 축제를 양산하기 일쑤이다.

돈만 투자하면 그것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아예 이벤트 기획 회사에 용역을 주어 마치 축제를 위탁사업처럼 수행하기도 한다. 그러니 축제를 하는 동안 주민들이 신명풀이를 하며 사회적 모순들을 폭로하는 제의적 반란과 커뮤니타스를 조성하는 축제의 진정한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지역축제의 주체가 되어야 할 주민들은 기껏 구경꾼 노릇이나 하며 남의 장단에 놀아나는 꼴이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투다.

축제일수록 오히려 민중을 더욱 소외시키는 경향이 있다. 평소에 잘 드러나지 않던 사회적 지위가 축제판에서 더 두드러진다. 개막식과 폐막식 등 공식적인 행사때도 특히 잘 드러난다. 이른바 본부석에는 각급 기관장과 지역유지 등 지역사회의 기득권층이 단상을 점유하고 있는 데 비하여, 일반 주민들은 단하에서 도열하여 서거나 바닥에 앉아서 그들의 지루한 인사말을 듣고 박수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도 개막식에 참가한 시민들은 형편이 낫다. 생업에 바쁜 빈곤층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민중이 주인되기는커녕 평소보다 민중을 더욱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때가 바로 축제 기간이다.

그러나 본디 축제는 그렇지 않다. 축제의 주인은 지역주민들 가운데서도 평소에 기득권을 누리는 지배층이 아니라 피지배층에 속하는 민중이다. 민중이 주체가 되는 까닭에 제의적 반란이나 커뮤니타스와 같은 축제의 본질적 기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었다.

억압구조의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민중의 신명풀이 욕구가 축제를 생산해 내는 문화적 계기였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사실상 위로부터 주어지는 축제는 한갓 이벤트일 뿐이자 관제 행사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진정한 축제문화는 예사 주민들이 주도하는 민중적 주체성과 진보적 변혁성을 담보하고 있어야 한다. 바보제든 카니발이든 별신굿이든, 동서고금의 축제는 밑으로부터 치받치는 민주적 저항과 지배 질서의 해체를 추구한다.

축제는 한갓 구경거리가 아니다. 축제는 현실적인 모순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기존 질서를 뒤집어엎음으로써, 민주적인 대동세계를 이루고자 하는 민중의 염원을 구김살 없이 펼치는 모의적 반란이자, 허용된 탈선이 난장판을 조성하는 해방공간이다. 따라서 지배층의 허위를 폭로하고 기성 도덕률을 풍자하는 다양한 예술적 장치를 만들어내고 기존 질서와 법규를 부정하는 각종 놀이판을 벌인다. 가장행렬을 위한 탈이나, 굿놀이의 일환으로 시작된 탈춤들이 좋은 보기이다.

한국의 탈놀이들은 특히 민중의식에 입각한 풍자성이 강하다. 축제때는 평소에 금지되었던 도박도 허용된다. 반상간의 신분차별이나 남녀간의 내외법도 무력화시킨다. 상민들이 양반들과 맞서는가 하면 남녀간의 자유로운 사랑도 보장된다. 그러므로 축제 현장이라 할 수 있는 별신굿판에서는 지배체제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폭로되고 사회적 규범과 도덕률은 철저하게 묵살되는 가운데 새로운 대동세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축제가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 것은 민중적 변혁성의 표출을 통해서 역사의 진보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했기 때문이다. 축제는 사실상 체제를 변혁시키는 힘이자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작은 혁명이다. 혁명이 아니고서야 하인이 상전을 욕보이고 상민이 양반을 공격할 수가 없다.

탈춤과 같은 풍자적인 예술 양식을 통해 민중적 가치를 내세우며 지배층의 기득권에 도전하고 무규범적인 행위와 자유로운 놀이를 통해 지배층 중심의 도덕률을 파괴해 버린다. 축제에서 난장을 트는 것도 팽팽하게 규범화된 일상의 질서를 의도적으로 깨뜨리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이 축제 기간에 허용된 모의적인 행위가 아니라면 사실상 혁명이나 다름없다. 허용된 반란과 규칙화 된 방종은 축제의 대표적인 기능인 '통풍관습(Ventilsitte)'에 해당된다.

축제의 혁명적 성향은 민중이 주체가 되어서 축제를 이끌어가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민중은 체제 모순의 희생자이므로 자연스레 이를 극복하려는 운동성향을 지닌 계층이다. 따라서 반상의 신분차별, 남녀의 성차별 등 모든 위계 질서를 해체하고 종교적인 신성 관념까지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리고자 하는 것이 민중이다. 일종의 무규범 상태이자 '사회적 백지(tabula rassa)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 혁명적 축제이다. 혁명은 깨끗하게 청소된 세계를 만들어내며, 그런 사회는 위계가 없는 사회 곧 모든 인간의 동질화를 말한다.

혁명이 해자(垓字)를 건너고 성문을 부스며 금지된 지역에 들어서는 것으로 표상되는 것처럼, 축제에도 그대로 투사되어 각종 금기를 어기며 난장을 벌이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은 축제를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축제가 신나는 것은 축제에서 경축하는 이념이나 사건 때문에, 또는 기념 대상의 사회적 기능과 고귀함 때문에 신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하고 분리된 시공간이기 때문에 신나는 것이다.

이른바 축제의 비일상성이 바로 신명을 보장하는 것이다. 평소에 허용되지 않던 거짓말이 허용되듯이, 모든 사회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게 풀어놓아서 마음껏 신명풀이를 할 수 있는 해방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축제이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일상성을 거꾸로 전도시키는 데서 신명이 난다. 탈춤의 미학이 '신명풀이'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원리 때문이다.

민중의 처지로서는 기존 질서의 굴레 속에서 결코 신명이 날 수가 없다. 지배층 중심의 일상을 거부하고 스스로 주인되는 삶을 만끽할 때 신명이 절로 난다.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배체제의 모순을 공격하는 일만큼 신명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이 개입하는 한 민중이 주도하는 축제의 본디 성격은 되살리기 어렵다. 관변 단체가 주도하는 축제에 지배체제를 풍자하고 기존질서를 뒤집어엎는 제의적 반란이나 전도, 커뮤니타스가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탈춤페스티벌에서는 탈춤의 본디 정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국내외의 모든 현실 문제들이 민중들의 시각에서 제기되고 비판되어야 한다. 국내의 사회적 모순들은 물론 국제적인 현안들이 민중적 시각에서 두루 거론되고 풍자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세계 사람들이 현실적인 문제들로 인식하는 각종 모순들이 창작탈춤으로 어떻게 형상화되어 풍자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궁금하게 여기고, 각국 민중들의 시선이 탈춤페스티벌의 현장으로 쏠릴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탈춤현장이 환경오염 문제와 모피옷, 부의 편중, 3세계의 기아, 시장주의 경제의 횡포 등 세계적 모순들이 제기되고 비판되는 풍자의 도가니가 될 때, 탈춤페스티벌은 외국 탈춤패들이 전혀 참여하지 않아도 세계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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