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이 부자 되는 법

박 혜 숙

나이 오십을 넘기고 나서야 아들을 얻게 된 남편은 이제󰡐부자󰡑가 되었다고 자신을 소개하곤 한다. 늘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못했던 내 입장에선 그 말이 야릇할 뿐이다. 부자(父子)라는 단어에 정말 부자(富者)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옛 어른들은 자식을 여럿 낳으면서자기가 먹을 것은 갖고 태어 난다라고 했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의 셈법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가 됐다. 다양해진 사회만큼이나 모든 걸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많아 졌다. 결혼을 늦게 하기도 하고 아예 관심이 없기도 하고 이혼도 흔하다.

자식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혼자 커가는 딸아이가 외로울 것 같아 뒤늦게 갖게 된 둘째였다. 아빠 나이가 많아 어쩔 땐 손자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런 말을 듣고도 입이 귀에 걸리게 웃는 걸보면 마음에 부자는 확실히 된 것 같다. 결혼을 하고 결혼생활 만큼이나 긴 시간동안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지만 부자와는 멀다. ‘워킹 푸어(Working poor)’인 셈이다. 일을 해도 가난한 계층이니 말이다. 질병에 걸리거나 실직하면 곧바로 절대 빈곤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는 계층을 워킹푸어라고 이야기 한다. 미국에서 1990년대 중반에 등장한 이 말은 우리나라에서는 1998년 외환위기 이후 통용되고 있다. 참 모순된 말이다. 일하는 사람이라면 가난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비정규직과 임시직이 많아서다. 안정적인 가계 경제를 위해서 투잡( two jobs)을 뛰기도 하고 또 그로 인해 오히려 병이 나서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우리나라 직장인 가운데 70% 이상이 스스로를 워킹푸어 라고 생각한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근면 성실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신화를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일 할 수 있는 의지가 있고 열심히 살아도 나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로 인한 좌절감은 20대 사회초년생이나 50대 퇴직을 앞둔 직장인 모두에게 불안감으로 다가오고 있다.

세상에 가난하게 살고 싶어서 사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 주변은 가난한 사람들이 늘 존재 한다. 그리고 이중의 감정을 갖는다. ‘불쌍하다는 동정의 감정, 또 하나는 왜 저렇게 살지? ‘나 같으면 저렇게 살지 않을 텐데라는 비난 섞인 감정이다. 그러나 가난은 개인적인 잘못 때문만은 아니다. 사회에는 가난한 사람이 벗어나지 못하는 구조, 한 번 가난해진 사람이 좀처럼 재기하기 힘들게 만드는 구조가 존재 한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더 부지런할 수 있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가난하면 낡은 옷, 보잘것없는 음식, 허름한 집 등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것 자체가 가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난은 낡은 옷이 아니라. 그렇게 입은 내 모습이신경 쓰이는 것이다. 빈부 격차가 심하지 않아 주변 사람들이 모두가 비슷하다면 혹은 사회에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는 문화가 없다면 낡은 옷은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가난을 부끄럽게 여긴다. 가난해도 자기만 당당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쉽지 않다. 집과 땅이 없어 집을 사거나 건물을 빌리면서 임대료나 이자를 지불해야 하고 갑작스럽게 필요했던 돈을 갚을 수 없게 되는 일은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다.

공자는 오십을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했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뜻이다. 공자가 산 시대에서 현재로 오면서 50은 하늘 한번 볼 수 없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나이가 된 건지도 모른다. 자식을 뒷바라지 하면서 노후도 생각해야 하는 현실이 있다. 자식에게 효도로 노후를 보장받을 수도 없고 늘어난 수명으로 인해 퇴직 후 30년은 거뜬히 살 수도 있다. 부자로 나이가기 위한 아니 가난으로 가지 않으려는 도전은 계속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해야 부자가 되고 좀 더 행복해질까? 마음을 비우고 편안해져야 한다. 그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그리고 돈이 들지 않는 친절한 미소와 말씨로 마음에 부자가 되어야 한다. 가난해도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많다. 그리고 마지막엔 어느 누군가에 치중된 지나친 부는 죄악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