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사랑(1)-피히테와 프로이드

영광백수 출신/ 광주교육대학교 교수/ 철학박사

지난주까지 철학자와 성에 대해 살펴보았거니와, 이번 주부터는 철학자들의 사랑에 대해 들여다보도록 하자. 과연 철학자들은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 적극적으로 다가간 경우도 있고, 소극적으로 뒤로 물러난 경우도 있다. 또 아름다운 결실을 맺은 경우도 있고, 가슴 아프게 실연이나 거절을 당한 경우도 있다.

적극적인 태도의 대표자로는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연설로 유명한 독일의 관념론 철학자 피히테(1762~1814)를 들 수 있. 어렸을 때부터 후원해주던 후견인이 죽고 나자 피히테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빠진다. 하지만 다행히 새로운 가정교사 자리를 마련하여 취리히(스위스)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아이의 부모와 다툰 끝에 그 자리에서 물러나고 마는데, 어떻든 이 사이 사랑에 빠져 약혼을 하게 된다. 그는 이때 불타는 열정으로 사랑의 편지를 썼다. “지금 이 순간, 폭발할 것만 같은 나의 이 열정을 당신에게 퍼부을 수만 있다면!”

그는 연인을 위해 시를 짓기도 했는데, 시 한 구절을 쓰는데 무려 한 시간씩 걸렸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결혼이란 혹시 날개가 잘려버린 채,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쓰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하였다. 하지만 약혼녀가 매우 양순하여 그래도 결혼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길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나폴레옹에 대한 해방전쟁이 시작되자, 그 부인(과거의 약혼녀)은 야전병원에서 간호사 일을 돕다가 장티푸스에 걸리고 만다. 이에 피히테는 그녀의 병간호에 정성을 다하였고, 그 결과 아내는 건강을 회복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꾸로 피히테 자신이 감염되어 세상을 뜨고 말았다.

프로이드(1856~1939,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의 약혼자 마르타는 프로이드 자신과 마찬가지로 유태인이었고, 그보다는 다섯 살 아래였다. 그가 스물다섯 살 되던 해에 자신의 집을 방문한 마르타를 처음 보고, 프로이드는 첫눈에 그녀야말로 평생 반려자가 되어야 할 여인으로 확신했다. 그리고 두 달 후에 약혼을 해버린다. 그런데 마르타는 이미 나이 많은 어떤 기업가와 결혼을 약속한 상태였고, 그 외에도 많은 열렬한 구혼자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처럼 남성들의 눈길을 끄는 여성이 불과 두 달 만에 프로이드와 약혼한 사실을 보아, 프로이드 쪽에서 얼마나 열렬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다. 어떻든 약혼기간 동안 프로이드는 약혼녀에게 대단히 많은 사랑의 편지를 쓰는데, 43개월 동안 무려 900통이 넘었다고 한다.

또 프로이드는 그녀가 사촌오빠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치열한 질투의 불길을 태운다. 그러나 곧 후회하고 조금도 가치가 없는 인간이 가장 훌륭한 처녀를 얻었는데도, 1주일이 멀다고 책망하고 질투하고 있소.”라고 하는 사과의 편지를 썼다. 그는 자기 이외의 사람에 대한 사랑이 조금이라도 마르타의 마음속에 스며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번은 친구인 음악가에게 사랑을 빼앗길까봐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고민에 빠진다. 그가 마르타에게 보낸 편지에는 지나치게 초조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하여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의 약혼기간은 그들에게 결코 즐거운 시간이 못되었다. 프로이드가 신혼여행을 가서 신부의 어머니(장모)에게 쓴 편지에는󰡒두 사람 사이에 시작되는 30년 전쟁의 첫날이 되기를 바라면서󰡓라는 구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에 있어서 사랑이라는 개념이 매우 복잡한 것이었음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다.

마흔 살 무렵부터는 처제가 한 식구로서 죽을 때까지 한 집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와 처제와의 관계에 대해서 여러 가지 좋지 못한 풍문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방대한 전기(傳記)를 쓴 존스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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