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윤/ 서울 잠실본동, 재경향우

영광군이 KIA 타이거즈의 홈경기 초청으로 네임데이 행사를 오늘(9) 오후 4시부터 광주KIA 챔피언스필드 경기장에서 진행한다. 이번 네임데이 행사는 오는 16일부터 18일까지 천년의 영광, 상사화를 품다라는 주제로 열리는 16회 영광불갑산상사화축제를 홍보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KIA 타이거즈는 대한민국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전라북도를 연고지로 하는 KBO 소속 프로야구 팀이다.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의 주식회사이다. 홈구장은 광주광역시 북구에 위치한 광주기아 챔피언스필드이다.

1982130일 대한민국의 프로 야구출범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가 창단됐으며, 200181일 기아자동차가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 대금 180억원과 KBO 가입금 30억원 등 총 210억 원을 KBO에 팀 인수 창단 금액으로 내고, 팀 역사 및 전통을 공식적으로 인수하여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광주광역시에는 아시아자동차 시절부터 기아자동차의 생산기지가 있어서, 현대자동차그룹의 해태 타이거즈 인수 당시 지역의 여론이 좋았다.

지금까지 10번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여 모두 우승을 차지할 만큼 KBO 리그에서 유일하게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에 머문 적이 없으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기만 하면 무조건 우승했다. 해태타이거즈 시절에는 1986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시리즈에서 4회연속으로 우승했다. KBO 리그에서 유일하게 정규시즌에서 8년 연속으로 2위 이상을 차지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2016년 현재까지 최다 우승 기록(10)을 가지고 있다. 2위는 삼성라이온즈의 8회다. 영광신문은 호남민과 함께한 35년 해태와 KIA타이거즈의 역사2회에 걸쳐 게재한다.

 

 

창단과 1982년 시즌

해태타이거즈는 1982130일 해태제과 본사에서 창단식을 열었다. 선수들의 대부분은 군산상업고등학교 출신이었다. 개막 후 초대 김동엽 감독이 1개월 만에 해임되고 조창수 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았다. 전기 및 후기 리그 우승을 모두 놓치고 3842, 4위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김성한은 투타를 겸업하며 전무후무한 10승과 타점왕(69타점)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김봉연은 22홈런을 기록하며 원년 홈런왕에 올랐다.

 

 

1983~1985: 김응용 감독의 첫 세 시즌

미국 조지아 서던 칼리지에서 야구 유학을 마친 김응용 감독을 김동엽의 후임으로 영입한 해태타이거즈는 1983624일 부산구덕야구장에서 열린 롯데와의 경기에서 전기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최초의 언더핸드 주동식과 타선에서는 김봉연, 김성한, 김종모 등 ‘KKK의 활약 속에 해태는 41무로 첫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안게 된다. 그러나 1984년과 1985년에는 모두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게 된다. 1984년 해태타이거즈는 전기리그 4, 후기리그 3위로 43543, 최종 순위 5위로 정규시즌을 마감하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 1985년에도 해태타이거즈는 전기리그 3, 후기리그 3위로 59521, 최종 순위 3위로 정규시즌을 마감했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

 

 

1986~1997: 해태 왕조-선동열과 이종범

1986년부터 해태타이거즈는 승승장구 우승의 참 맛을 아는 야구단, 최강이라는 수식어가 딱 맞았다. 그야말로 타이거즈의 한국야구 지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이른바 해태 왕조의 서막을 알렸다.

그러는 도중 1990년 한국야구위원회 조정으로 인해 호남에서도 전라북도에 쌍방울이 창단하게된다. 해태타이거즈의 연고지 및 신인 1차 지명권도 호남 전 지역에서 광주직할시와 전라남도로 축소됐다. 해태타이거즈는 1982년부터 1989년까지 전주야구장에서 홈경기를 분산 개최해 왔는데, 전주에서 거둔 통산 성적은 40124, 승률 0.623로 높았다. 특히 1987년에는 전국체전의 광주개최로 인해 플레이오프를 전주야구장으로 옮겨서 치렀는데, 해태타이거즈는 OB베어스를 전주에서 물리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적이 있다.

1990년 해태는 플레이오프에서 삼성라이온즈에게 패해 한국시리즈 5연패에 실패하나, 1991년 빙그레이글스를 누르고 6번째 우승에 성공하게 된다. 이 해 골든글러브 수상자 10명 중 무려 6(선동열, 장채근, 김성한, 한대화, 이호성, 이순철)의 골든글러브 수상자를 배출했으며, 팀 최다 수상 신기록을 경신했다.

1992년 선동열의 부상으로 플레이오프에서 롯데자이언츠에게 패배했으나, 1993년 괴물 신인 유격수 이종범의 등장과 다승왕 조계현을 비롯해 선동열, 이대진, 송유석, 이강철 등의 맹활약으로 81423무의 압도적인 승률을 기록하며 한국시리즈에서 진출하여 삼성라이온즈를 꺾고 우승했다.

1994년 이종범이 0.393(역대 2)의 타율을 기록했으나,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이글스에게 패배하여 4위에 머물게 된다. 1995년에는 이종범과 이대진의 방위 복무로 인한 전력 공백으로 4위로 시즌을 마치고, KBO 규정에 따라 준 플레이오프에도 진출하지 못하여 시즌을 마친다.

1996년 선동열의 주니치 이적의 공백을 투수 임창용과 강태원이 메우며, 한국시리즈에서 42패로 여덟 번째 우승을 확정지었다.

1997년에도 이종범, 이대진, 장성호 등의 맹활약으로 아홉 번째 우승을 거머쥐어, 15년간 우승 9번이라는 전무한 기록을 세우는데, 투수 김상진이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최연소 완투승을 거두었다.

 

 

1998~2001: 왕조의 쇠락

이종범이 주니치로 이적한 후 맞은 1998년 시즌에 해태는 시즌 5위를 기록했다. 199621순위로 지명한 장성호(.312)를 발견한 데에 위안을 삼았다. 장성호는 이때 맹활약하며 시름에 빠진 타이거즈 팬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타이거즈는 팀 중심 장성호가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이 IMF 관리 체제 하에 들어가 모기업 해태제과식품의 자금난이 심해진 것은 2001년까지 해태타이거즈의 악재가 됐다. 1999년 임창용을 상대로 트레이드로 영입한 양준혁과 홍현우, 트레이시 샌더스의 맹활약으로 팀 최다 홈런 기록(210)을 경신했으나, 마운드의 부진으로 통합 7위에 머물게 된다. 2000년에도 역시 모기업의 자금난으로 6위에 머물렀고, 해태의 통산 우승 9회를 이룬 김응용 감독마저 시즌을 마치고 라이벌 팀 삼성라이온즈로 떠나 김성한 수석코치가 감독으로 그 뒤를 잇게 된다. 2001년 시즌 중반인 7, 결국 해태타이거즈는 기아자동차에 인수되어 이름을 81일부터 KIA타이거즈로 팀명을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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