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기묘한 행동(8)-원효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을 떠났던 원효(617-686, 신라의 승려)는 한 초막에 찾아들었다가, 잠결에 바가지의 물을 마신다. 잠에서 깨어나 그것이 해골에 괴인 썩은 물이었음을 알고, 세상의 온갖 것이 오직 마음 하나에 달려있음을 깨달았다. 발길을 돌려 경주로 돌아온 원효는 이때부터 엄한 계율에서 벗어나 문란한 생활을 즐겼다. ‘파계승이라고 하는 비난이 그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그의 법회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잘생긴 데다 우렁찬 목소리를 가졌을 뿐 아니라, 설법의 내용 또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도끼에 자루를 낄 자가 없느냐? 내가 하늘을 받칠 큰 기둥을 깎아보련다!”고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녔다. 아무도 그 뜻을 몰랐는데, 태종 무열왕이 이 노래를 전해 듣고 관리를 시켜 원효를 찾게 하였다. 관리들이 때마침 문천교를 건너는 원효를 발견하였다. 이때 원효는 일부러 다리에서 뛰어내렸다. 관리들이 그를 가까운 요석궁으로 인도하였고, 요석공주와 하룻밤을 지내고 나서 파계하고 말았다. 그 후 공주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설총(신라 10대 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원효는 2주도 채 못 되어, 다시 불자(佛者)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어느 날 원효는 광대들이 표주박(박을 절반으로 쪼개어 만든 작은 바가지)을 가지고 춤추는 것을 구경하였다. 이때 느낀 바가 있어, 광대와 똑같은 복장을 하고 표주박을 두드리면서 화엄경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불렀다. 대중들에게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알릴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는 노래를 부르면서 큰 길을 걷기도 하고, 거지들과 어울려 잠을 자기도 하며, 귀족들 틈에 끼여 기담(奇談-기이한 이야기)으로 날을 새우기도 하였다. 깊은 산중의 암자에서 꼼짝하지 않고 좌선(坐禪-마음을 한 곳에만 집중하여 무념무상의 상태에 들어가도록 하는 수행)으로 지낼 때도 있었으며, 무애당에서 홀로 밤을 새우며 저술에 골몰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행동 때문에 그는 다른 승려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소외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왕이 당나라로부터 불경 <금강삼매경>을 구했는데, 그 해설을 듣고 싶어 강의할 대사를 물색하였다. 그러나 그 불경은 대단히 난해했기 때문에, 이를 강의할 만한 마땅한 인물을 찾아낼 수 없었다. 이때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대안법사가 이것을 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원효밖에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원효는 왕과 여러 신하들, 전국의 명망 높은 스님들 앞에서 강해를 시작하였다. 그 강설은 흐르는 물처럼 도도히 장내에 울려 퍼졌으며, 위풍당당한 그의 모습을 찬양하는 소리가 고승들의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 마침내 원효대사는 살아 있는 부처님이시다!”라는 외침이 장내에 쩡쩡 울렸다. 그 가운데는 처음부터 계속 눈물을 흘리는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요석 공주였다. 감격에 겨운 그녀는 부처님 고맙습니다. 부처님 고맙습니다.”만 되풀이하였다. 강론을 끝마친 원효는 고승들을 훑어보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얼마 전 나라에서 100개의 서까래(마룻대에서 도리 또는 보에 걸쳐 지른 가늘고 긴 통나무)를 구할 때, 나는 감히 그 축에 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하나의 대들보(큰 들보. 건물의 이쪽 칸과 저쪽 칸을 연결하는 나무. 한 나라나 한 가정의 운명을 지고 나가는 사람)를 구하니, 비로소 나 혼자 그 역할을 다하는구나!”

그로부터 원효는 더욱 더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의 연구가 미치지 않는 불경은 하나도 없었다. 686330일 산중 깊숙이 자리 잡은 경천의 남산 작은 절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니, 그의 나이 예순 아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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