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은 신군부… TV에 공개수배후 경찰에 붙잡혀 교도소에서 40일간 단식하다 숨져

5·18민주화운동의 불씨를 지핀 고 박관현 열사(사진)5월 광주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23개월간의 도피생활을 스스로 끝냈다는 증언이 처음 나왔다. 박 열사는 문재인 대통령이 185·18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에서 “5월의 죽음과 광주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세상에 알리려 했던 많은 이의 희생과 헌신도 함께 기리고 싶다며 호명했던 4명 중 한 명이다.

박 열사는 1953년 영광군 불갑면 박정환 씨(2014년 작고)5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영광 불갑초교, 광주동중, 광주고를 졸업했다. 육군 병장으로 제대한 뒤 1978년 전남대 법대에 차석으로 입학해 법조인을 꿈꾸며 고시공부를 했다.

19786월 송기숙 명노근 씨 등 전남대 교수 11명이 우리의 교육지표라는 성명을 통해 유신 독재를 비판하는 6·27 교육지표 사건이 터졌다. 학생들은 교수들의 연행에 항의하며 격렬한 시위를 했다. 고시 공부와 현실을 고민하던 그는 197812월부터 2개월 동안 광주 서구 광천동 노동실태조사에 참여하고 들불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 광천동은 아시아자동차 하청업체가 많아 근로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다. ‘서울의 봄이 찾아온 19804월 전남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그는 같은 해 514일부터 사흘간 옛 전남도청 앞에서 진행된 민족민주화성회를 이끌었다.

비상계엄해제 등을 요구하며 횃불을 들던 성회는 5·18민주화운동의 불씨가 됐다. 그는 신군부가 5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민주 인사들을 체포하자 주변 권유로 전남 여수로 도피했다. 한 달 뒤 서울의 동생 집으로 피신해 인근 친척집에서 1년간 은신했다. 제수인 유봉순 씨(62·)의 소개로 유 씨의 6촌 오빠가 운영하는 서울 공릉동 한 공장에서 일했다. 도피 생활을 하면서 대학 후배 등을 만나 5·18 때 숨진 들불야학 선후배 윤상원 박용준 열사 이야기와 상무대 영창에서 고문을 받은 다른 동료들의 사연을 들었다. 신분을 감추고 살던 그는 공장 동료에게 나는 숨어 사는 놈이라는 독백을 자주 했다고 한다. ‘5월 광주와 함께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198245일 공장 식당에서 점심을 먹던 그는 TV에 자신의 사진이 나오는 것을 봤다. 당시 수사당국은 5·18 수배자와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관련자들의 얼굴과 현상금을 공개했다. 그는 도피할 수도 있었지만 식사를 마치고 묵묵히 일하러 가다 경찰에 붙잡혔다. 박 열사가 체포된 뒤 유 씨와 유 씨의 6촌 오빠도 검거됐다.

박 열사는 서울에서 광주로 이송되던 중 유 씨가 왜 피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죄인도 아닌데 왜 피하느냐. 죄인은 바로 신군부다. 5월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답했다. 유 씨는 당시 광주의 한 경찰서에서 한 달간 아주버님이 고 김대중 대통령에게 500만 원을 받았다는 거짓 진술을 하라며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의 6촌 오빠는 4개월간 실형을 살았다. 박 열사는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광주교도소에서 ‘5·18진상 규명. 재소자 처우 개선등을 요구하며 40일간 단식하다 19821012일 숨을 거뒀다. 가족들은 2013년 박 열사가 무죄라며 광주지법에 재심을 청구했으나 기각당했다. 재판부는 박 열사가 무죄는 맞지만 1심 선고 이후 숨져 재심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박 열사의 누나 행순 씨(68)조만간 동생에 대한 재심을 다시 청구해 동생의 명예를 되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