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이중성(2)-공자와 김시습

말과 행동이 따로 놀거나 현실과 교묘하게 타협해버리는 경우가 철학자들에게도 종종 있었다. 4대 성인(聖人) 가운데 한 사람인 공자의 경우, <논어>에서 결코 완벽한 인간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제자의 항의에 쩔쩔매며 변명하는 스승이었고, 낮잠을 잔 제자에게는 더 이상 손댈 곳도 없는 인간이라며 화를 내기도 했다. 제자 안연(顔淵=안회. 공자의 수제자)이 죽었을 때는 자기가 그토록 강조한 예법을 어기고 소리 내어 통곡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다. 때로는 자기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상복(喪服) 입는 기간을 1년으로 줄이자는 제안을 하는 제자에게 자네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해도 되겠지.” 해놓고, 그 제자가 나간 뒤에 다른 제자들에게 그를 비난하기도 했다. 음식은 까다로운 편이었고, 술은 아무리 마셔도 정신이 혼란해지지 않았다. 옷의 색상과 품위에도 세심한 주위를 기울였고, 작업복으로 오른쪽 소매가 짧은 옷을 직접 만들어 입었다고 한다. 관청에 나가 일할 때는 윗사람에게 온순하고 아랫사람에게 엄격한, 다중인격자의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생육신(生六臣) 가운데 한 사람인 김시습은 수양대군이 임금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공부를 포기한 채 평생 벼슬과는 인연이 없이 살아갔다. 그리고 사육신(死六臣)의 시체를 거두어 묻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영광신문 강성률 교수의 철학 이야기’ 169, 철학자들의 기묘한 행동 9, 김시습 편 참조) 여기까지는 그야말로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러나 세조가 자기 손에 죽은 사람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사(佛事-부처를 위하는 일과 관련된 모든 일)를 크게 벌이자, 이에 적극 협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효령대군(조선조 3대 태종의 둘째 아들. 세종대왕의 형)<묘법연화경>의 번역 사업을 주도적으로 해나갈 때, 김시습은 효령대군의 간청에 의해 신미, 학조 등 이름난 중들과 함께 내불당에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임금의 공덕을 칭송했다. 그답지 않게 굴절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물론 이에 임금인 세조는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큰 대우를 해주었다. 때는 가을이었다. 임금은 햇과일이 들어오면 관례대로 궁중과 종친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내불당의 김시습에게도 배나 포도 따위를 자주 보내주었다. 이에 김시습은 물건은 비록 작은 것이지만 성의는 크다며 아부성(?) 발언을 하고 있다. 아무튼 그는 10여일쯤 내불당에 머물다가 다시 금오산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서울에서 종자(從者-누군가에게 종속된 사람. 심부름꾼)가 말 한 필을 끌고 내려와 이렇게 고하는 것이었다.

효령대군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성상(聖上-살아있는 임금을 높이어 부르는 말. 주상과 같은 의미)께서 옛 흥복사를 새로이 세우고 이름을 원각사라 지었습니다. 스님들을 모시고 낙성회(落成會-건물을 완성한 후에 갖는 법회)를 갖는데, 여기에 참석하시게 하라는 분부를 받고 왔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김시습은 그날로 말을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임금의 성덕(聖德-임금의 덕을 높여 부르는 말)을 칭송하는 시를 지었고, 또 낙성회 첫날 임금이 대사령(大使令-관청에서 천한 일을 맡은 사람을 사령이라 하는데, 그 가운데 우두머리를 일컬음)이라는 벼슬을 내리자 또 이를 찬탄하는 시를 지었다. 그러나 그는 서울에 있은 지 며칠이 못 되어 길을 떠났다. 경주로 내려가는 길에 임금이 보낸 사자를 중간에서 만나 다시 올라오라는 분부를 받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병을 핑계대고 끝내 다시 서울로 올라가지 않았다.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