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죽음(1)-자연사

철학자들 역시 신이 아니었기에 언젠가 한번은 죽어야 했다. 그런데 게 중에는 아주 편안하게 생을 마감한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사형을 당하거나 살해된 경우도 있다. 물론 자살한 경우도 있었다. 마하비라라고 하는 자이나교(인도의 금욕주의 종교)의 창시자는 부유한 귀족가문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사후(死後)의 영생을 저주스럽게 여기고 심지어 자살을 바람직스럽다고 보는 교리에 따라 스스로 굶어죽고 말았다. 금욕주의자들인 스토아학파의 제논과 클레안테스(기원전 331/6-233/2)도 자살하였다. 특히 클레안테스는 의지가 강하여 스스로 굶어 죽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철학자들 가운데 자살한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당했고,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길을 걷다가 졸도하여 숨졌으며, 니체는 병마(病魔)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최고의 염세주의자로 알려진 쇼펜하우어 역시 베를린에 유행하던 콜레라를 피해 도망쳤다가 한참 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높다는 사실은 커다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번 호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생명, 즉 천수(天壽)를 다 누리다가 죽음을 맞이한 철학자들 이야기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플라톤의 경우에는 젊은 시절 우여곡절과 어려움이 많았다. 스승 소크라테스를 구하려는 노력이 실패하여 외국으로 도망쳐야 할 때도 있었고, 어리석은 군주에게 목숨을 잃을 뻔도 했다. 노예로 팔렸다가 풀려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노년은 행복하였다.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은 없었으되, 여러 방면에서 성공한 제자들이 주변에 많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그를 결혼식에 초대하였다. 그는 여든 살의 나이로 축하연에 참석하였다. 축제의 기운이 점차 높아가는 와중에 노 철학자는 조용한 곳으로 물러나와 의자에 앉은 채,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축하연이 끝났을 때, 환락에 지친 사람들이 그를 깨웠다. 그러나 플라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 밤 축하연의 환희 속에서 영겁의 세계로 가버린 것이다. 아테네의 모든 시민이 그의 영구(靈柩-시체를 넣은 관)를 따라 묘지까지 갔다. 당장 그를 신성시하는 전설이 생겨났으며, 마침내 아폴론(제우스의 아들로서, 태양신)의 아들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1662, 마흔 살이 채 안된 파스칼(프랑스의 종교철학자)은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는 당시 중요한 수입원이었던 합승마차의 이익금 가운데 절반을 떼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도록 당부하였다. 그는 누이에게 나는 오래 전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몹시 좋아했는데, 정작 그들을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어.”라고 말했다. 임종이 다가오자 파스칼은 공손한 태도로 성찬과 종유(終油-신체의 고통을 덜기 위하여 몸에 바르는 기름)를 받았다. 그는 사제에게 감사를 표시하였다. “주여! 저를 버리지 마옵소서.” 이것이 파스칼의 마지막 말이었다.

오랜 경련이 이어지다가 드디어 심장이 멎었다.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독신으로 지냈던 파스칼이 392개월간에 걸친 이 땅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그의 방에는 <기독교의 변증론>을 위한 각서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친구와 친척들이 나중에 이 원고를 정리하여 출판한 것이 저 유명한 명상록 <팡세>(“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한 서문으로 유명)이다. 언젠가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죽음이란 살기를 그친 것이 아니고, 이제부터 참으로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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