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죽음(5)-자연사(러셀, 비트겐스타인)

자유사상과 인간 이성의 대변자라는 찬사 속에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러셀(1872-1970,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은 매우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 마흔여덟 살 되던 해인 1920년 죽었다는 소문이 난 것이다. 중국의 베이징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때에 기관지염을 무척 심하게 앓은 것이 조국에 잘못 전해진 것이다. 병이 나은 뒤 러셀이 접한 그 신문의 보도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러셀이 죽었다고 우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꺼이 용서해주실 것이다.”

영국의 전통적인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러셀은 할머니 아래에서 스파르타식의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고독한 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던 러셀은 수학과 철학을 공부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5년 연상의 아내와 이혼한 후 그는 무려 세 번이나 더 결혼식을 올린다. 물론 그때마다 상대는 달라졌다. 정치활동에도 적극 참여했으며 평화주의자들과 더불어 반전운동도 전개했다. 여성해방운동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청중들로부터 썩은 달걀과 쥐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소련의 레닌과 볼셰비키를 찬양했다는 이유로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했으며, 아인슈타인과 함께 원자폭탄 반대 캠페인을 벌였고, 쿠바 위기 때는 케네디와 흐루시초프에게 자제를 호소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이러한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그는 왕이 내리는 영국 최고의 훈장과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그의 세계적 명성은 197023일 밤 웨일스에서 9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지속된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항상 고독이 앙금처럼 남아 있었다. “우리는 드넓은 대양의 바닷가에서 텅 빈 밤하늘에 대고 절규한다. 때때로 어떤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화답한다. 그러나 그것은 물에 빠져 죽은 혼령의 목소리이다. 다음 순간, 다시 침묵이 엄습해온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부유한 철강 재벌의 53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비트겐스타인(1889-1951, 철학자이자 논리학자)은 음악적 재능이 풍부했으며, 이미 소년 시절에 최신형 재봉틀을 만들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캠브리지 대학에서 강의할 때의 그의 모습이 아주 특이했다고 한다. 강의실 한 가운데에 있는 나무의자에 앉아 대화식으로 강의를 하는 동안에도 필요할 때면 혼자 사색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동안 학생들은 침묵하면서 기다려야 했다. 강의가 끝나면 그는 완전히 탈진해서 부랴부랴 극장으로 달려갔다. 아무 영화나 한 편 보면서 그 짧은 시간에나마 철학을 잊어버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의 생활방식은 무척 검소하였다. 방에는 장식품이 거의 없었으며, 양복을 입는다거나 넥타이를 맨다거나 또 모자를 쓴다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식사도 아주 간단히 하였는데, 오랫동안 빵과 치즈만을 먹었다. 평생 가난한 독신으로 지낸 비트겐스타인은 은둔생활을 오히려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추종하는 무리들에게는 물론이고, 심지어 자신의 천재성을 인정해준 스승 러셀에게마저 나의 철학을 오해하고 있다.”, 가차 없이 비판하는 결벽증을 보였다.

대학을 떠난 후 아일랜드의 한적한 농장에서 지내다가 만년에는 더블린의 한 호텔에서 기거하는데, 온갖 질병에 시달린다. 끝내 불치의 암 환자가 되어 동료철학자와 제자들, 그리고 고향 가족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말년을 정리하던 비트겐스타인은 1951, 62세의 나이로 케임브리지에 있는 주치의의 집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아주 멋진 삶을 살았다고 전해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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