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진/ 향리학회 회원

영조가 만난 '법성포' 서문거리 최씨 형제

영조 39, 17637, 세곡을 실은 '법성창' 조운선이 상납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태안 앞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조난당했다.

이 배에는 '진량면' 치리(지금의 '법성포 서문거리)에 사는 최삼석, 최사석 형제 등 모두 15명의 선원이 타고 있었다.

밤낮으로 표류하던 이들은 이 맘 때인 추석 즈음(음력 813)에 청나라사람들에게 구조되어, 이듬해 1월 하순에 중국 하북성 '옥전현'에서 우리나라 사신들을 만나 영조 40, 17642월에 '소흑산도'로 무사히 귀환하게 된다. 조난 된지 7개월 여 만이다.

비변사에서 이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겠다고 청하자, 영조는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왔는데 그냥 보낼 수 없다고 '흥태문'으로 친히 나가서 만나 위로하고 옷과 식량을 주어 '법성포'로 돌려보냈다. 이는 영조실록비변사등록에 수록되어 있는, 지금부터 250여 년 전, 영조 나이 여든 살 때 기록이다.

 

기록으로 꽃 피운 '법성포단오제''강릉단오제'

10여 년 전에 필자의 지인이 법성향지저술에 참고하라고 고문서 한 뭉치를 보내왔다. 영조가 친히 만난 '서문거리' 최씨가의 '호적단자로 보였다. 영조가 만난 이 들 형제가 귀환하고 1년 뒤인, 1765년부터 1873년까지, 100여 년 동안, 무려 여섯 왕대(,,,,,고종)에 이르는 한 집안의 내력이었다. 여기에는 집안의 세계와 선대가 종2품 가선대부였다 등의 내용을 포함하여 '진내리'가 조선시대 '상리'였다는 법성향지의 기록과 달리 그 이전에는 '치리'였음 도 밝혀주고 있다.

'강릉단오제' 는 홍길동의 저자 허균이 그가 쓴 성소부부고에 관전기를 남겨 오늘 날 세계유산이 될 수 있었고, 선조 때 해운판관으로 '법성포'에 와 영광군수와 선유놀이를 하였다 고 조관기행에 일기를 써 놓아 '법성포단오제'를 국가문화재로 보존하기 위해 오랜 세월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이 고장 사람들에게 힘을 보탰다. '법성포단오제'도 이 고장의 신명희(서울 휘문 졸업, 법성중.고 초대교장)법호견문기를 저본으로 발간된 법성향지1850년 조선 철종 때 기록을 남겨 국가지정에 이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렇게 기록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며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법성문화진흥원의 역사문화탐방길

지금 '법성문화진흥원' (원장 성시환)에서는 위와 같은 기록들을 집대성하는 문헌조사사업이 한창이다. 더불어 이를 지역경제에 접목하여 관광자원과 먹거리 창출사업도 병행하고 있다. 머지않아 첫 사업으로 '역사문화탐방길'을 선보일 계획이라고 한다.

'비각거리' 초입에서 '진내리' 마을길을 따라 '도래지'-'대통재'를 돌아 '법성진성' 성곽 길을 경유하여 '숲쟁이'로 윤회하는 계획도를 보니 이 길에는 조선시대 관아 터는 물론, 조선시대 첨사비 군, 하리거리병을 낫게 해 준다는 '철비', "바른(), 나라()를 세워야()한다.“는 염원으로 아들 3형제의 이름에 , , 자를 써 작명한 신명철(법성포초 6년제 1회 졸업, 광주사범 진학, 광주학생독립운동 주도 1년 옥고), 광복 후 초대 면장 생가 터, 107년 전에 개설된 '법성포우편소' , 90여 년 전에 창립된 '법성포노인회' 터였던 항일운동의 대부 고경진(평양 대성학원 졸업) 생가 터, 일제강점기 '청년회관' , 1906년에 개교한 '법성사립보통학교' , 일제에 항거하며 7년 여 동안 감옥을 내 집 들어 다니듯 했던 영광청년운동의 거목 남궁현(전주 신흥, 서울 보성 졸업)과 신문화의 산실 '법성교회' , 3.1독립운동 모의 처 엄 선비 댁, 면암 최익현이 중수기를 쓴 '제월정' 터 등 등, 이 고장의 역사가 통째로 도처에 널려있다.

'법성문화진흥원'의 야심찬 이 계획이 실현되어 지역경제와 역사교육의 현장, 그리고 이낙연 국무총리의 국회의원 시절 선거공약인 법성진성 복원사업 등에 크게 도움이 되고, 선현들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생동감 있는 탐방 길로 조성되기를 기원한다. 자못 크게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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