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수필가 사진가

우리는 2017년 같은 경우를 격동의 해라고 말한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국정 농단과 국정원 비리, 청와대 수석들의 농단 등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다른 점은 시작과 마무리로 나뉘지만 상황은 또 다른 시작을 예감하게 한다. 그만큼 정치 적폐는 수 천 년을 묶은 숲 바닥에 켜켜이 쌓인 낙엽처럼 가늠이 어렵다. 정유년을 이렇게 흘러 보내면서 즐거움은 없었다. 즐겁지 않았다고 해야 맞다. 분노하고 안타깝고 아프고 자괴감만 들었다. 국민을 위해 자신들을 선택해 달라고, 국민을 사랑한다고 외치던 무리들이 자신들이 그렇게 봉사하겠다던 국민들에게 준 선물이다. 결코 정치인들은 국민에게 기쁨을 주진 않는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철저한 국가주의 세뇌를 받으며 자랐다. 어디에도 개인은 없으며 는 대의를 위해선 언제든 희생을 해야 한다. 군주국가와 제국주의 혹은 독제국가에서 보편적인 현상이 아직도 대한민국에선 유효하다. 과거 조선의 왕과 대신들은 백성을 자신들의 삶을 위한 소모품이나 구성물로 보았다. 국가가 위험에 처하면 자신들이 가장 먼저 도주를 했고 뒤에 남은 백성은 죽창을 들고 구국에 목숨을 바쳤다. ‘짐이 국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찾은 나라는 다시 그들의 것이 되고 백성은 원래의 역할로 돌아갔다. 한말의 고종은 무능했고 민비는 시아버지와 권력싸움으로 나라를 망쳤다. 권력을 위해 외부의 세력까지 끌어들인 치명적인 실수의 결과다. 그래서 그들의 손에 목숨을 잃지만 단지 일본인의 손에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아직도 추앙을 받고 뮤지컬로 만들어져 공연이 된다.

가깝게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그는 인민군이 삼팔선을 넘자 바로 대전으로 몸을 피했고, 아직도 서울인 것처럼 국민들을 속였다. 심지어 한강을 건너고 있는 국민을 무시하고 다리를 폭파해버렸다. 문제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국민은 자신의 정권과 안위를 위한 소모품에 다름 아니다. 박정희는 정권유지를 위해 많은 학자와 지사들을 간첩으로 몰아 죽였고, 전두환은 군대를 풀어 대 도시를 초토화 시켰다. 이렇게 국민의 헌법적 권리를 말살하는 국가보안법을, 그것도 최대의 피해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손대지 않고 내버려 두었고 오히려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해 잘 먹고 잘 살게 만들었다. 내년에는 전두환 경호비도 올린다는 소문이다. 도대체 사회적 정의란 무엇일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친일 청산과 국가보안법을 시도했다가 치명적 상처를 입었다. 그래도 시도는 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안타깝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정치인맥이 얇았던 그의 무모한 시도는 바로 정의였다. 바로 이 정의적 자존심은 그의 목숨이었고 결과도 그렇게 되었다. 이명박과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다시 과거로 회귀해 국민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위한 대상이었다. 대통령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사익을 위해 쟁취했다. 이제 그 실체가 고구마 줄기처럼 올라오고 있다. 썩은 냄새가 진동하지만 이들은 정치보복이라 부른다. 정치보복이란 없는 사실을 만들어 얽는 것이고 저지른 범죄를 수사하는 것은 부패척결이라고 부르지만 이들은 구분을 거부한다.

정치인은 국민을 진보와 보수로 나누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국민에겐 진보도 보수도 없다. 웃기는 이야기다. 자신의 판단으로 결정하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일반 시민에게 무슨 진보가 있고 보수가 있겠는가. 모두 정치인들의 방식으로 보는 색깔론이다. 국민은 전체를 보고 느끼고 결정할 뿐이다. 2017년 정유년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민주주의 특강을 했다. 역설적이게도 대통령이 탄핵되고 파면까지 되면서 국민의 의식을 두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다. 이제 진보와 보수로 나누고 작은 나라를 다시 동과 서로 나누지 말자. 어차피 우리는 대한민국의 울타리 안에서 산다. 재벌을 옹호하든 노동자를 위하든 판단의 차이다. 하지만 국민의 대의가 어디로 가는지 눈치를 살펴야 할 부류는 이제 정치인들이다. 자신들이 적폐임을 모르고 서로 상대 정적에게 손가락질을 해대던 어리석음을 국민은 촛불을 밝혀 깨우쳐주었다. 아직도 깨지 못한 정치인과 일부 국민은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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