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죽음(10)-자연사(육상산과 왕양명)

세 살 때에 어머니를 여읜 육상산(陸象山, 1139-1192, 중국 남송의 철학자이자 교육자)은 어려서부터 철학적 사색을 즐겼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성품이 결코 나약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백이 크고 활달하여 호걸다운 기품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학자에 머무른 것이 아니고 여러 곳에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렸을 때 너무 쇠약하여 각혈병(, 기관지 점막 등에서 피를 토하는 질병)까지 앓은 적이 있는 상산은 결국 병으로 쓰러지고야 말았다. 스스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지만, 그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죽는 그 날에도 평일과 마찬가지로 보좌진과 함께 정무를 의논하고 침실로 돌아가 쉬고 있었다. 마침 밖에는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그는 조용히 향불을 피우고 목욕한 다음, 새 옷을 갈아입고는 단정히 정좌하였다. 집안사람들이 그에게 약을 주었으나, 먹지 않고 한 쪽으로 밀쳐놓았다. 이때부터 다시는 말을 하지 못했으니, 당대의 심학대사(心學大師-마음을 유일한 실재로 내세운 육상산을 가리킴)는 쉰 세 살을 일기로 심장의 박동을 정지시켰던 것이다.

육상산의 심즉리(心卽理) 학설에 따르면, 세상의 이치가 모두 내 마음 속에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마음이 유일한 실재이다. 우주가 곧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곧 우주이다. 그러므로 본심을 깨닫기만 하면 독서를 지루하게 많이 할 필요가 없다. 육상산의 이 학설은 왕양명에 의해 계승되어 육왕(陸王)의 학으로 불리게 된다.

육상산이 세상을 떠난 지 300년 만에 한 철인이 나타났으니, 바로 그가 명나라 때의 사상가 왕양명(王陽明, 1472~1528)이다. 그의 어머니가 임신 8개월 만에 조산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고 청년기에 이미 폐병으로 피를 토하기도 했던 양명은 스물여덟 살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무공(武功)을 세워 이러저러한 벼슬길을 거쳤던 왕양명은 56세 되던 해, 조정으로부터 반란군 토벌의 임무를 부여받는다. 광서(廣西-중국 남부의 동남아시아와 베트남에 인접한 지역)의 전주에서 야만족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곳 총독이 이를 막지 못했던 것이다. 총독에 임명된 왕양명은 그러나 바로 이 무렵, 폐병에 이질까지 겹쳐 있었기에 그 자리를 간곡히 사양하였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할 수 없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광서로 향했다. 양명이 그곳에 당도하자 반란군은 지레 겁을 먹고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의 반항이 그곳 관리들의 악정(惡政-악독한 정치) 탓임을 알게 된 양명은 태장(笞杖-볼기를 치는 형벌) 100 대씩으로 다스려 그 죄를 면해 주었다. 또한 그는 학교를 세워 교육과 교화에도 힘썼다.

그런데 일기가 불순한 데다 과로하여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도적 떼를 몇 번이나 토벌하고 난을 평정하는 동안 양명의 기력은 모두 소모되고 말았던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그는 날 때부터 선병질(腺病質-임파성 체질을 가진 어린아이에게 많이 나타나는 결핵성 질환. 임파성 종창이나 습진, 만성 비염, 또는 뼈나 관절의 결핵 등의 증세를 나타내는 체질)인 데다 더욱이 학문과 사색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신체가 더욱 허약해져 결국 몸에서 피를 토하는 각혈병을 얻고 말았다.

도저히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때, 어떤 제자가 찾아와 선생님, 무슨 유언이라도 남길 말씀이 없으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눈을 깜박거리며 이 마음이 밝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고 대답하고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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