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수필가 사진가

정유년이 가고 무술년이 온다. 끝과 시작의 연결지점을 단 한 장 남은 달력이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연말이라는 상황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웬만한 결심의 실행을 신년 1일부터로 잡는다. 금연 금주가 빠를수록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신년에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결심과 함께 바로 시작하는 금연보다는 신년에 의미를 두고 실행하는 금연의 실패율이 훨씬 높다는 것이다. 아무튼 다시 신년 무술년이 시작되지만 시간에 줄을 그은 것도 아니고 칸을 나눈 것도 아니다. 펴 놓으면 변함없는 시간의 흐름일 뿐이다. 단지 사람들이 태양과 달을 기준으로 1년과 월로 나누었고 하루를 만들었다. 다시 시간으로 세분 된 흐름을 우리는 세월이라 부른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부산물이 인간의 조급증이라면 대비책은 이른바 마음공부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딱딱하고 재미없는 내용으로 삶을 말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정규 교육에서 서양 철학을 접하고, 유명한 철학자들의 이름도 거의 알지만 정작 우리의 동양 사상은 거의 공부하지 않는다. 고루한 학문이라는 것이 이유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생각임에는 틀림없다. 왜 우리 고전은 고루한 학문으로 남게 되었을까. 단언하건데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양 문화와 전통 문화는 엄밀하게 말하면 구분이 없다. 단지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와 용(), ()와 리(), 소학(小學)과 대학(大學), ()과 공()의 관계일 뿐이다. 어차피 삶의 형식이요 방법이고 이치다. 여기에 동서가 다르지 않다. 가장 귀에 익은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은 대승불교 경전인 반야심경의 구절이다. 색과 공은 동일체로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조금 확대 해석하면 물질은 실체가 없으며 실체가 없으니 물질적 현상이 있다는 뜻이다. 바로 없음의 있음이다. 노자는 도경을 통해 쓸모없음(無用)으로 무의 기능을 말한다. ‘그릇은 빈 공간이 있어서 쓸모가 있고, 문을 내어 만든 방은 그 텅 빈 공간이 있어서 기능을 한다.(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그래서 도는 항상 하는 일이 없지만 이루지 못함이 없다.

조상들이 해왔던 공부는 대단히 현묘하다. 미국을 비롯해서 서구인들은 우리 고전을 배우기 위해 들어오고 우리는 그곳으로 유학을 간다. 문제는 그들은 양쪽을 모두 공부하지만 우리는 우리 고전을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양의 교과서는 인간의 본성을 다룬다. 그래서 어렵다. 좋게 말하면 심오하다. 공부하는 사람은 적은데 고리타분하다는 것은 대부분 알고 있다. 읽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재주가 있을까.

무술년이 이틀 남았지만 실제는 다르다. 이틀 후에 다가오는 무술년은 우리 마음에 존재하는 개념적 의미일 뿐이다. 대한민국에서 맞는 신년 1일은 지구 반대편에선 신년이 아니고 무술년은 2018216일이 되어야 한다. 전통에선 해가 바뀌는 절기를 입춘으로 보니 24일에 바뀌고 더 정확히는 오전 68분이다. 결론은 해가 바뀐다는 의미는 없으며 사람들이 그렇게 구분해서 정했을 뿐이다. 송년식이나 신년하례식은 우리 마음에 자리한 쓸모없는 격식이다. 나이라는 고정관념이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굴레라면 벗어나는 것도 자신이 해야 한다. 답은 우리 고전과 경전에 있다. 특히 성리학은 절대 만만한 학문이 아니다. 살아서의 복과 사후의 천당이라는 욕심도 말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사람처럼 사는 법을 가르칠 뿐이다. 여기엔 비움과 내려놓음의 아름다운 철학이 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있고 노자의 위학일익 위도일손(爲學日益 位道日損/배움은 날마다 더해지고, 도는 날마다 덜어진다)이 있다. 하지만 덜어내는 행위는 학문의 과정을 통해야 한다. 무지랭이는 덜어내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도를 통해서 덜어내고 또 덜어내야 할 대상은 지식이요 학문이 된다. 굳이 새해를 의식한다면 신년엔 틈틈이 우리 고전과 씨름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최근 공부 움막을 마련한 후배에게 지어준 당호가 바로 심재(心齋). 신년에는 마음을 굶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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