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수필가 사진가

운전을 하면서 누구나 한번쯤 짜증을 내봤을 것이다. 운전대를 잡으면 거의 겪는 일이다. 그만큼 사회는 이기주의와 자기편의주의에 빠져있다. 길 가운데에 차를 세우고 승하차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차선에 정차 후 거리낌 없이 일을 보러 가는 운전자도 있다. 심지어 가게 주차장 입구에 차를 주차해서 막아버리기도 한다. 주인이나 다음 손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에게 따지거나 충고를 하면 바로 싸움이 난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자신에게 가해지면 참지 못하는 이상함을 보이는 것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다. 싸우기 싫으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이런 현상은 운전자 외에도 많다. 개를 풀어놓고 키우는 사람을 나무라면서 정작 자기는 커다란 맹견을 풀어놓는 사람, 지인의 자녀들을 예의 없다 지적하지만 자신의 애들이 부모 친구들에게도 인사조차 않는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만나면 훈계를 하고 역지사지를 말하지만 자신은 언행이 전혀 다르고 표리가 부동한 사람 등 예를 들면 끝이 없다. 그래도 짜증의 정도는 정치인들의 언행을 넘지는 못한다. 미디어의 발달로 예전에 했던 자신의 발언들이 튀어나와 무색 할만도 하겠지만 몰염치라는 절대 무기를 가진 정치인들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 듬직함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정치계는 짜증의 도가니다.

사회정화의 가장 중요한 말머리는 배려와 역지사지라는 단어지만 행동은 어렵다. 배려(配慮)란 배우자를 생각하듯 살펴주는 것인데 자신의 편의를 내려놓고 타인을 먼저 살피는 행위는 현대사회에서는 부처님도 힘들다. 더욱이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바로 경쟁으로 들어가는 우리 교육제도 아래에서는 언감생심이다. 옆의 친한 짝꿍을 이겨야만 성공으로 가는 정 없는 세상에서 남을 먼저 배려하라는 자체가 무리이다. 부와 명예를 안고 사는 소위 고위층과 재벌들은 본인의 노력이든 부모의 후광이든 기득권자들이다. 이른바 피나는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한 사람들로서 역지사지는 DNA조차 찾을 수 없는 부류다. 위하는 것은 오직 자신이고 추구하는 것은 사익이다. 이를 위해선 사회의 정의도 도덕도 배려도 역지사지도 최대한 무시한다. 우리는 그들을 매일 쏟아지는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만나야 한다. 결국 사회적 성공은 그들처럼 사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역지사지라는 아름다운 도덕을 말로만 행한다. 행위로 나타나는 역지사지는 자신만 피곤할 뿐만 아니라 정신건강에도 해롭다.

우리 조상들은 사랑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다. 크게는 배려심도 사랑에서 나오지만 선조들은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사랑이라는 말을 대신했다. 측심(惻心)에 역지사지를 더하면 묵가의 시조 묵자(墨子)가 외쳤던 사랑이다. 측은지심은 맹자의 나오는 인간본성의 네 가지 중 하나로 인()에서 나온다. , ()은 측은함을, ()는 부끄러움을, ()는 사양하는 마음을, ()는 시비를 가리는 마음을 이른다. 많이 들어 봤을 사단(四端)이다. 자기 행동에 부끄러움을 알고, 사양할 줄 아는 미덕을 갖추고, 시비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지혜를 갖고, 남의 처지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겸비한다면 역지사지는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이다.

역지사지란 내가 남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자신을 내려놓아야 한다. 마음의 대부분을 차지한 욕심을 비우고 명예욕도 버리고 를 돌아보면 비로소 내가 보이고 다른 사람도 보인다. 이타심은 여기서 나오고 바로 질서의 출발이다. 강조하지만 우리의 뇌는 자신을 곧잘 속인다. 남이 하는 잘못은 정확하게 지적하면서 자신의 잘못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내로남불의 전형이다. 마음을 비우고 차분히 자신을 돌아보자. 일일삼성(一日三省)은 못할망정 한번 정도는 반성을 겸한 성찰의 시간을 가져봄도 좋을 것이다. 배려와 역지사지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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