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수필가 사진가

글을 쓰면서 문화예술을 주제로 삼을 때가 가장 힘들다. 깊은 상처를 사포로 문지르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소위 문예 부문에서 활동한 기간이 30년을 훌쩍 넘으며 영광의 문예 증인을 자처하고 있지만 마음은 전혀 편하지 못하다. 과연 영광군에서 30~40년을 변하지 않고 제 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주마등처럼 스치는 짧지 않은 기간을 돌아보면 변해도 많이 변했다. 시내를 흐르던 천은 복개가 되어 가장 넒은 중심로가 되었고 교촌리와 백학리, 묘량면 효동 등의 거미줄 같던 골목은 열십자를 그리며 한길로 변하며 소멸 되었다. 오후면 골목에서 뛰놀던 아이들의 목소리도 따라서 사라졌고 골목길을 닮았던 우리의 정서도 곧게 펴져 메마르고 말았다. 발전과 개발은 순작용과 역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보존에는 치명적이지만 생활을 편하고 윤택하게 유지하는 데에는 긍정적이다. 그래서 문화 선진국에선 보존을 바탕에 깔고 개발을 한다. 후세에 남길만한 유산과 유물은 최대한 보존을 하고 나이가 오래된 고거수는 될수록 손대지 않는 원칙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보호수와 유물 유적이 가장 많이 훼손되었던 원인이 새마을 운동이었다면 개발과 보존의 관계가 명확히 드러난다. 새마을 운동이 아니었어도 아쉬운 유적은 많이 사라졌다. 채화정이 그랬고 신도장이 그랬다. 사유지이니 어쩔 수 없지만 대다수의 군민들은 아쉬워한다. 멀게는 일제강점기에 우체국 앞 신작로를 내면서 헐어버린 진남루가 있고 가까이는 군청 청사를 지으면서 뜯었다가 시나브로 없어져버린 운금정이 있다. 그리고 영광읍사무소 당직실로 쓰던 한옥 객사도 이젠 기억에서조차 사라졌다. 모두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진 귀한 유물들이다. 모든 기억이 생생하기만 하다. 단주리 새터방죽 주위는 아파트 촌으로 바뀌었고 북적이던 우시장과 5일장은 옮겨가고 흔적도 남지 않았다. 이렇게 갑자기 변해버린 고향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이제 6개월 후면 지방선거다. 어쩌면 중앙선거보다 우리와 직접성을 갖는 것이 지방선거이고 보면 신중해야 한다는 말이 굳이 필요 없다. 영광군이 지방자치 이후 가장 변하지 않고 있는 부문이 바로 문화예술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 서론을 길게 잡았다. 지금까지 선출직 중에 문화를 사랑하고 이해할 줄 알았던 사람은 장담하건데 한명도 없었다. 심지어 정신문화의 중요성을 알만한 선출직 또한 단 한사람도 없었다. 이렇게 우리는 25년의 문화 암흑기를 살았다. 심지어 정종 박사는 고향이 좋아 노년을 영광에서 지냈지만 그 분의 머릿속에 든 위대한 유산을 방치해버렸다. 이른바 천덕꾸러기 노인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조그만 집무실이라도 만들어 드리고 영광의 숨은 역사를 정리하게 부탁 드렸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정신 유산이 되었겠지만 그럴만한 지성을 가진 선출직은 없었다.

영광 문화예술인의 70%를 차지하는 전시예술인들을 위한 전시관이나 미술관 한 칸 없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예술의 전당 전시실은 개인전 하기에도 좁음은 물론 조명이나 벽, 기둥 등이 전시용이 아니라는 것을 너도 알고 나도 안다. 더욱이 전시 중에도 문을 닫아걸고 불을 꺼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원인은 관람객이 없기 때문이다. 왜 관람객이 없을까.

올해는 선거의 해다. 적은 수가 아닌 영광의 문화예술인들은 표의 향방을 잘 정해야 한다. 지역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다. 정신문화가 풍요롭지 않으면 영광은 계속 침체된다. 올해는 반드시 조운 생가를 보존하고 문학관도 지어야 한다. 특히 그림 한 점 걸 장소가 없는 전시예술인들을 위한 작은 전시관은 그들의 숙원사업이다. 학연이나 지연, 혈연이 문학관이나 미술관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문화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최소한의 자존감은 갖고 살아야 한다. 다시 말해 스스로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서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기초도 떼지 못한 아마추어 관변문예단체들에 휩쓸리지 말고 영광의 정신문화발전을 위해 순수한 마음으로 인선에 임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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