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죽음(12)-자연사(이황)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퇴계 이황(1501~1570)은 고봉 기대승(전라남도 나주 출신의 문신이자 학자. 성균관대사성, 대사간, 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 전북 고부에서 객사함)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사단칠정논쟁>으로 유명하다. 당시 퇴계는 대사성(大司成-성균관의 으뜸 벼슬인 정3품의 당상관직)까지 지낸 59세의 노대가였고, 고봉은 겨우 과거시험에 급제한 33세의 소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계는 고봉의 이론을 신중히 검토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할 때마다 고쳐나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는 당시의 침체된 학문 풍토에 참신한 기풍을 일으켜, 우리나라 성리학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퇴계 이황은 평생에 걸쳐 두 가지를 실천했다고 전해진다. 하나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 매일 아침 변소에서 이를 마주치는 일이었다. 그는 변소에 앉아 아래윗니를 힘껏 부딪쳐서 턱에 힘주기를, 적어도 쉰 번 이상씩 반복했다. 이 운동은 이를 튼튼하게 해주는 것은 물론 아래의 항문을 포함하여 전신운동이 되도록 한다고 한다. 틀니도 없고 치과전문의도 없는 당시였지만, 이런 운동을 반복한 그의 이는 늙어서도 잘 보전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는 투호(投壺-두 사람이 청, 홍색의 화살 모양 막대기를 병 속에 던져 넣은 후, 그 수효에 따라 승패를 가리는 놀이)를 하는 것이다. 이 놀이를 퇴계 자신은 물론 제자들에게도 열심히 하도록 권했다고 한다. 원래 투호는 온몸의 균형을 잡고 거리를 정확히 측정해야 그 적중률을 높일 수 있다. 몸이 흐트러지면 결코 잘 맞힐 수가 없는 법이다. 또 투호는 정신력을 집중해야 한다. 잡념이 생겨 정신이 산란해지면 결코 명중시킬 수가 없다. 그리하여 첫째는 몸의 건강을 위하여, 둘째는 정신 집중을 위하여 그는 투호를 생활 속에 도입했던 것이다. 퇴계는 글을 배우러 오는 사람에게 먼저 투호를 시켜 보았다. 그 솜씨를 보고 건강을 점쳐보는 한편, 또 학문을 할 수 있는 덕이나 집중력을 가늠해보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계는 일흔 살이 되던 1570119, 종갓집 제사에 참석했다가 감기에 걸린 것이 악화되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123일에는 제자를 시켜 남에게 빌려온 책을 돌려보내고, 4일에는 형의 아들 영에게 유서를 받아쓰게 하였다. 5일에는 관을 짜라고 명하고, 8일 아침에는 평소 아껴오던 매화 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저녁 5시경에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

퇴계는 조카에게 받아쓰게 한 유서에 이런 내용을 담았다. 나라에서 하사하는 예장(禮葬-나라에서 예식을 갖추어 행하는 장례)은 사양할 것이며, 비석도 세우지 말고, 명정(銘旌-일정한 크기의 천에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본관, 성씨를 쓴 기)에는 처사이공지구(處士李公之柩)’라고만 쓰라고. 여기에서 말하는 처사(處士)’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평생 학문만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평소부터 그를 흠모한 선조 임금은 이런 겸손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에게 영의정의 벼슬을 추종하는 한편, 장례 또한 성대하게 치르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뒷날 이런 사실을 전해들은 지리산 밑에 사는 남명 조식(曹植-조선조 중기의 학자.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성리학을 연구하여 통달하고, 시문에도 뛰어나 당시 퇴계와 더불어 명망이 매우 높았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할 벼슬을 다하고 나서 처사라니... 진짜 처사는 나지.”

물론 이 말도 새겨볼만 하긴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퇴계의 본래 마음이랄까, 그 참뜻이 손상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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